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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조총련 탈북자 에이코 증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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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사키 에이코 씨가 지난 4월말 미국에서 열린 북한자유주간 행사에서 증언하고 있다.
RFA PHOTO/ 이현기

 

일본 교토 출신인 가와사키 에이코 씨는 조총련이 설립한 조선인학교 고급부 3학년생이던 1960년 17살의 나이에 ‘귀국선’에 올랐지만, 지상낙원으로 선전했던 북한 실정은 딴판이었으며, 김일성주석 사망 이후 대규모 기아에 시달리는 아비규환을 목격하고 탈북을 결심했다고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밝혔습니다. 가와사키 에이코 씨는 또 북한 귀국선에 오른 많은 조총련 간부들이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처형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에이코 씨는 먼저 조총련 교토 본부 위원장 가족에 대한 이야기 들려줍니다.

 

: 조총련 교토 본부 위원장이 희생된 이야기에요. 제가 교토에 있을 때 교토 본부 위원장을 하신 가족들이 3차 귀국선으로 1959년 말에 의장과 맏딸이 일본에 남고, 나머지 가족들은 아주머니가 자식들을 4명인지 데리고 북한에 갔어요.

 

조총련 교토 본부 위원장은 아내가 암으로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고 북한에 귀국한 후, 참혹하게 끌려가 죽임당했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고 말합니다.

 

: 조총련 간부의 가족이기 때문에 평양에서 상당이 높은 수준의 대우를 받으면서 살았었어요. 그러나 결과는 평양에 있던 아주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래 그 연락을 받고 맏딸과 의장이 귀국했는데 그 후에 참혹하게 끌려가서 죽임을 당한 거에요.

 

많은 조총련 간부들이 정치범 수용소에 강제 수감되었다고 섬명 합니다.

 

: 일본에서 간 사람 중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서 희생됐거든요. 그런데 그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거의 다 조총련 간부를 하던 사람들이 끌려가서 본인들은 죽고 가족들은 요덕이나 사리원이나 귀국자들만 따로 가둬 놓는 강제 수용소에서 생활한 거에요.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 강철환 씨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특히 재일동포 출신 탈북자 강철환 씨가 일본에서 간 사람 중에 3세이거든요. 강철환 씨 할아버지를 내가 일본에 있을 때부터 알아요. 강철환 씨가 교토 출신이기 때문에요. 그분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교토의 조총련 산하에서 활동하셨거든요. 그때 저는 학생이었고 그분들은 활동가였기 때문에 알고 있었어요.

 

조총련 간부들이 왜 정치범 수용소에 가게 됐는지 지금도 알 길이 없다고 설명합니다.

 

: 저는 북한에 있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조총련 간부들이 무엇 때문에 자기들(북한)이 지휘하고 모든 활동을 보장해 준 북한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는지 오늘도 저는 알지 못하고 있어요. 정말 북한에 있을 때 한덕수 의장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할 정도로 말이지요. 그건 조총련의 승인이 없이는 그렇게 집행을 못 했을 거란 말입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막 잡아다가 죽이고 가족들은 가두어 넣고 노예처럼 살게 했는지

 

북한 땅을 밟지도 못하고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경우도 소개합니다.

 

: 심한 사람은 어느 정도 였는가! 귀국 사업이 거의 끝날 때 갔는가 끝난 다음에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젊은 부부가 아들 하나 데리고 간 경우인데요. 그 사람 아들은 7살 이었어요. 우연이 수용소에서 나와서 나의 아들을 알게 되어서 그 내용을 알게 됐는데요. 우리 아들이 너무나 놀라와서 나에게 그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런데 그 가족은 아들하나 데리고 갔는데 배에서 내려서 북한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그냥 트럭에 실려서 아버지는 다른 데로 끌려가고 아들하고 어머니는 강제 수용소에 들어 갔다는 거에요. 10년 넘게 살고 우연히 우리 아들을 만나게 된 거에요.

 

에이코 씨는 북한에 도착하자 마자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는 경우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 그것은 북한에서 어떤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일본에서 보낼 때 이미 수용소에 가도록 결정되어 있다고 봐야돼요. 그러면 일본같은 사회에서 그런 일들이 허용되나요.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일본인데요. 그렇다면 조총련에 활동하는데서 그 젊은 사람이 조총련에 의견에 맞지 않았다고 하면 조총련 조직에서 내 보내면 되는 거지 어떻게 죽이라고 북한에 보낼 수가 있어요. 저는 도저히 용납 못할 그런 일인데 실지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에요.

 

재일동포 귀국자들만 따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살았다고 증언합니다.

 

: 숫자적으로는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아마 적어도 수천 명이 넘겠지요. 가족 중에서 아버지를 먼저 데리고 갑니다. 북한에서는 보위부에 체포됐다고 하면 가족들이 일체 못 물어보게 됐어요. 왜 잡아갔습니까?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이런 질문은 못하게 됐어요. 정치범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가족들도 일체 물을 수 없고 자기들 가족 처분을 기다리기 위해서 문밖에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또 정치범으로 잡혀 갔다고 소문만 돌면, 그 누구도 그 가족과는 접촉을 안 하려고 해요. 그리고 며칠 있다가 가족들을 싣고 가는 거에요. 가족들은 주로 요덕 수용소로 실어 갔어요. 거기는 일본에서 간 귀국자가 수용소에 들어가면 그 안에서 일본에서 간 사람만 살았어요. 내가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내게 말했는데, 사실은 수용소 안이지만, 일본에서 온 사람들만 사는 일본 마을에서 살았다고 해요. 그렇게 차별을 했던 거에요. 70년대 하반기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많은 사람들이 끌려 갔는데요. 조총련과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든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보통 12년에서 15년 정도 수용소에서 살다가 놓여 나왔어요.  가장들은 죽여 버렸으니까? 가족들은 다시 평양에 다시 가는 건 드물고 철조망 안이냐 바깥이냐 뿐이지 두매산골에 산 거에요. 내가 아는 분도 요덕수용소에 갇혀 있었는데 나왔다는게 철조망 밖일 뿐이지 같은 요덕에 있는 거에요. 요덕은 조그마한 두매산골이거든요. 그러니까 생활필수품을 좀 구하려고 시내 나오면 우리 집에서도 자고요. 형편도 이야기 하고 같은 귀국자이기 때문에 알려줘서 아는 거에요.

 

일본 노래 불러 혼줄난 한 가정이야기입니다.

 

: 말을 조심해야되는거요. 한가지 예를 들면, 5층에 귀국자 사람들이 살았거든요. 한 가정은 교토에서 내가 다니던 학교 하급생이었어요. 그래서 왔다 갔다 지냈는데이 집에서 남편의 생일인지 그래 몇 가정이 모여서 한잔 한 거에요. 한 잔 한김에 밤중이었는데 일본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일본 노래 못 부르게 됐거든요. 그런데 일본 노래를 불렀는데 누군가가 그 아파트 앞을 지나다가 들었단 말이에요. 그것이 통보가 됐어요. 그렇게 돼서 함경남도 도당위원회에 불려 가서 날마다 비판서라는 것을 많이 써대고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몰라요. 그래 추방하느니 마느니 말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 집 주인이 상당이 일을 잘하는 분 이었어요. 그러니까 아마 그 덕분에 조금 도움이 되었는지 추방은 안 되었어요.

 

북한에서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소금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 국영 상점에서 파는 것이 없었어요. 국영 상점이라고 간판을 붙였지만, 거기서 파는 게 없는 거에요. 인민반 앞으로 (한 인민반은 15세대 내지 30세대 ) 몇 달에 한 번씩 두개 내지 세 개씩 표가 나오는 거에요. 그 표가 나오면 회의를 열고 그 사이에 총화를 잘 한 사람에게 인민반장 이라는 사람이 표를 하나씩 나눠주는 거에요. 그걸 가지고가서 사는데 귀국자는 대상도 안 되어요. 그러기 때문에 귀국자들은 자체로 해결해야하는 형편이었고요. 식료품을 파는데도 소금은 마음대로 살 수 있었어요.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소금밖에 없을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