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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통일문화산책(상반된 남북한 6.25 기념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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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ASER: 북한에서는 6. 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으로 보고 6월 25일을 ‘미제반대투쟁의 날’로 보지요 / 지난 625는 참 비참하고 다시 돌이켜 생각하기조차도 싫을 전쟁이었습니다 / 지금은 북한에서 불법으로 남침했다는 것이 확실하죠

 

백과사전인 위키백과에 ‘한국 전쟁’을 이승만 정부의 대한민국김일성이 내각총리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자 자기 주도의 민족통일을 이루고자 다툼이 있을 때, 38선 부근에서 간헐적으로 국지전을 벌이다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대한민국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습적인 침공이 감행되면서 한반도를 전장으로 하는 전면전으로 확대되다가,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휴전 중인 전쟁이라고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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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아시아방송 통일문화산책 오늘은 남북한에서 6.25와 7.27을 어떻게 기념하는지와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회고담으로 함께합니다.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은 남북한에서 6.25를 어떻게 기념하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임채욱 선생: 6월에는 민족의 비극을 상징하는 날 6월 25일, 6.25가 있습니다. 동족이 서로 다투고 싸웠다는 부끄러운 역사의 기념일이지요. 한 때 남한에서는 이날 반공결의를 다진다는 뜻에서 고기를 먹지 않고 술을 금지하는 무주무육(無酒無肉)일로 지내기도 했지요. 북한에서는 6. 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으로 보고 6월 25일을 ‘미제반대투쟁의 날’로 보지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지도 5년이 되는데, 김일성은 한반도의 반쪽인 남한을 또 해방시킨다는 뜻으로 전쟁을 일으킨 모양입니다. 이날 북한에서는 군사행진을 중심으로 무력시위와 군중의 결의를 다지는 군중대회 행사를 열어오고 있지요. 남한에서도 전쟁 후 초기에는 군중결의대회도 가졌지만 대체로는 6. 25를 잊지 않으려는 행사위주로 기념하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톤 D.C. 인근에 사는 참전용사 이경주 씨의 625전쟁 당시 회고담을 듣습니다.

 

이경주: 625전쟁은 대한민국 안에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세계적으로도 이와 같은 비참한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되지요. 물론 지금 세계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아시아 지역 몇 개 나라가 영토분쟁으로 아웅다웅하고 있는데 어쩌든지 지난 625는 참 비참하고 다시 돌이켜 생각하기조차도 싫을 전쟁이었습니다.

 

이경주 씨는 지금도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참전용사가 많다고 설명합니다.

 

이경주: 전쟁 치르고 전역했지마는 참으로 비참했어요. 참 많은 생명들이 죽어갔고 1,000만 이산가족이 생기고, 수많은 부상당한 군인들이 지금까지도 병원에서 고생하며 고통에 시달림을 받고 있는 눈물겨운 우리 병사들이 많이 있어요. 이런 일들로 인해서 그 후세들, 다른 가족들이 얼마나 지금까지도 피눈물을 흘리는 어려운 상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몰라요.

 

한국전쟁 발발 65주년을 맞은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참전용사들의 회고입니다.

 

참전용사: 많은 병사들이 희생당하는 것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공산당이 얼마나 무서운 행동을 했는지 다시 공부를 했으면 해요.

 

자유아시아방송과 특별 인터뷰 한 한국전 참전용사 김석춘 씨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제목의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1950년 6월 24일, 휴가를 받아 나는 인천 선화동 13번지 우리 집으로 갔다. 하룻밤을 자고서 25일(일요일) 아침을 먹고 인천 시내 극장에 간다고 나왔다. 인천에 주둔하고 있는 육군부대 주번 사령들이 군인들은 자기의 본부대로 즉시 돌아가라며 마이크로 외치고 다녔다. 큰 도로에는 화물 자동차들이 삼각형 깃대를 달고 서울 쪽으로 마구 달려가고 있었다.

‘또 인민군과 전투가 벌어진 모양이로구나’ 그 당시, 38선에서는 크로 작은 전투가 자주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밥은 많이 먹겠지.’이런 생각을 하며, 빨리 집으로 돌아와서 지참 물을 챙겨 부대로 복귀를 서둘렀다.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나를 불러 세웠다.

‘석춘아, 점심때가 다 되어가니 점심을 먹고 가라.’

‘큰일이 난 모양이니 빨리 가야 합니다.’

사랑이 깃든 어머니 손을 뿌리치며 하직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고 회고합니다. 김석춘 선생의 이야기 직접 들어봅니다.

 

김석춘 선생: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하는데 어머님은 그냥 가서 안 된다고 점심을 먹고 가야 된다고 붙잡지마는 억지로 뿌리치고 인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한남동 기차역에서 내리니까 택시 운전기사가 군인 아저씨 빨리 차를 타시요. ‘부대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택시 운전기사가 한남동 우리 부대까지 데려다 줬습니다. 그래서 택시 운전기사가 고마웠습니다.

김석춘 씨가 지금도 기억하는 전투 중에 이야기다.

김석춘 선생: 인부가 밥을 지고 산으로 올라왔거든요. 배식하려고 가마니에 손을 집어넣는데 그 당시에는 비닐도 없고 해서 가마니에다 주먹밥을 해서 주먹밥 하나에다가 소고기 조그마한 것 붙여서 동그렇게 뭉처 있고 아무 종이에 싸지도 않고 빈 가마니에 넣어서 가져온 밥인데, 인부가 배식하려고 엎드려서 가마니에 손을 넣고 밥을 들어 올리는 데 인민군 포탄이 인부 등에 맞아 터졌어요. 그래서 인부의 온 시체가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서 그걸 거둬서 호에 넣고 그를 묻어 주었습니다.

 

한 탈북 여성은 북한에서 어린 시절부터 받은 세뇌교육으로 너무나 익숙하게 남한의 북침을 기정사실로 알았지만, 남한에 와 본 기록영화로 북한의 치밀한 남침이었음 알았다고 말합니다.

탈북 여성: 지금은 북한에서 불법으로 남침했다는 것이 확실하죠, 제일 중요한 것은 북한에서는 먼저 남한에서 북침을 했는데 자기네 북한 측이 30분 만에 반격을 해서 남으로 밀고 나갔다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하나하나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니 어떻게 치밀하게 전쟁준비를 다 했다는데 30분 만에 북측이 반격을 해서 밀고 넘어갔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말이 안 맞잖아요.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은 7.27 휴전기념일에 관해 설명합니다.

임채욱 선생: 북한에서는 6. 25를 조국해방전쟁이라 한다고 했는데요, 7월 27일 휴전이 된 날은 조국해방전쟁승리의 날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정전기념일이다가 1993년 휴전협정 40주년이 되는 해부터 이렇게 정하고 노동당 창건일이나 정권수립일에 버금가는 기념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날 행사는 군사퍼레이드가 빠지지 않지만 그밖에 참전했던 노병들이 참가하는 전국노병대회, 청년들의 군 자원입대식, 사진전람회, 각종 토론회 영화상영 등이 열립니다. 북한은 특히 6월 25일 ‘미제반대투쟁의 날’에서 7월 27일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일’까지 한 달간을 ‘반미공동투쟁월간’으로 정하고 이 기간에 온갖 군사관계 행사를 집중시켜서 반미적개심을 고취하는 많은 행사를 열고 있지요.

 

김석춘 선생이 한국전쟁과 관련해 젊은이들에게 주는 충언입니다.

김석춘 선생: 국민들이 다 합심해서 단결해 충성심이 가득 차야하는데 우리 한국에 촛불시위 등을 볼 때에 너무 안타까워요. 자기 조국이 없고 자기 가정이 없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요즈음 젊은이들은 가정과 조국이 어떻게 되든 간에 생각하지 않고 자기 혼자만 편안해 지려고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실제적으로 이북 사람을 만나봤을 때 너무너무 안타까운 것이 많이 있어요. 자유라는 것은 하나도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하는 일도 절대로 알지 못하고 아버지하고 아들하고도 마음을 맞출 수가 없는 사회인데, 그런 것을 모르고 이남의 일부 사람들은 북한도 자유롭게 사는 거다 생각하는데 북한실정을 알아 북한 동포들 아픔에 함께 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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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