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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통일문화산책(상해임시정부에 대한 남북한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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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재개관식.
사진-연합뉴스 제공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북한은 임시정부가 자유주의에 입각한 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헌법에 따른 것이니까 자기들과 이념이 맞지 않다고 본 것이죠

백과사전 위키백과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영어: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19년 ~ 1948년)는 1919년 3월 1일 경성(京城)에서 선포된 3•1 독립선언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 침탈과 식민 통치를 부인하고 한반도 내외의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9년 4월 13일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망명 정부이다. 같은 해 9월 11일에는 각지에 설립된 임시정부들을 흡수•통합하여 통합임시정부로 발전하였다. 줄여서 임정(臨政)이라고도 부른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19년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대한제국의 영토를 계승하고 구 황실을 우대한다고 명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요인이었던 이승만은 광복 후 수립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87년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계승 의지가 수록되었다.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기념일을 맞아 통일문화산책 오늘은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남북한의 견해에 대해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알아 보겠습니다.

임채욱 선생: 네 흔히 상해임시정부라고 부르지만 정식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이지요. 여럿 있던 임시정부 중에서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됐기 때문에 상해임시정부라고 부르지요. 상해임시정부가 성립된 게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 그 해니까 올해로 수립 97주년이 되는군요.

그 때 임시정부가 몇 개 된다는데 어떤, 어떤 것이 있었습니까?

임채욱 선생: 알려지기로는 7개가 있지요. 그러나 그 가운데서 세 곳은 수립 추진주체가 밝혀지지만 나머지는 밝혀지지 않아서 이름만 있지 어떤 인사들이 어떻게 세웠는지를 알 수가 없지요. 수립주체가 밝혀진 세 곳은 서울에서 세워진 대조선공화국, 러시아 땅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세워진 국민의회, 그리고 상해에서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인데, 대조선공화국은 보통 한성정부라고도 부르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세워진 국민의회는 노령정부라고 부르기도 했죠.

이 세 개의 임시정부가 세워진 과정은 어떠합니까?

임채욱 선생: 한성정부는 기미년 그러니까 1919년 3월 중순부터 서울에서 추진돼서 4월 23일 수립된 것으로써 비록 비밀스럽게 추진했지만 국민대회라는 절차를 거쳤고 각료이름도 발표되고 통신을 통해 세계에 알리기도 했지요. 다음 노령정부도 그 해 2월부터 준비를 해서 3월 21일 임시정부 체제를 완성하고 활동을 시작했지요. 상해임시정부는 같은 해 4월 초 서울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3도 대표를 뽑아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4월 13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 세 개의 임시정부가 통합하지요?

임채욱 선생: 네 그렇지요. 세 임시정부 가운데 상해임시정부는 우선 국호를 명시하고 있고 의회를 구성하고 있어서 가장 완벽한 형태를 지녔기에 그 해 9월 15일 상해임시정부 중심으로 통합이 순조롭게 이뤄지지요. 하지만 노령의 일부인사는 너무 상해임시정부 중심으로 통합됐다고 해서 참여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최근 알려지기로는 한국에서는 이 임시정부를 기념하는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한다지요?

임채욱 선생: 한국에서는 매년 4월 13일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에 행사를 열고 독립운동에 몸 바쳤던 선열에 대한 추모를 합니다. 이번에 임시정부를 기념하는 기념관을 짓기로 하는 것도 이러한 정성의 일환이지요. 기념관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으로 100주년이 되는 2019년까지 건립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임시정부를 인정하지도 않고 평가도 아주 나쁘게 한다지요?

임채욱 선생: 북한은 임시정부가 자유주의에 입각한 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헌법에 따른 것이니까 자기들과 이념이 맞지 않다고 본 것이죠. 그래서 욕 하면서 이렇게 평가하지요. “실로 상해임시정부안의 사대매국노들이 한 일이란 이른바 정부를 차려놓고 애국동포들로부터 운동자금이나 걷어들여 탕진하며 강대국들에 대한 청원운동이나 하고 서로 물고 뜯고 하는 파벌싸움이나 일삼아 온데 지나지 않았다” 이 표현은 북한의 역사책인 조선전사 15권에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책의 평가도 이렇습니다. “림시정부는 그 어떤 대중적 지지기반도 못 가진 정부였으며 그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한 망명집단이였다. 림시정부 요인들은 자치파니 독립파니 하는 파벌을 이루고 서로 지도적 자리를 차지하려고 추악한 파벌싸움과 내각개편 놀음을 끊임없이 벌리였다.”

북한의 평가처럼 임시정부는 싸움질만 한 것입니까?

임채욱 선생: 사람 사는 곳에 어느 곳에서나 대립과 갈등은 있기 마련 아닙니까? 불미스럽고 못마땅한 부분도 있었겠지만 임시정부가 실현시키려고 노력한 그 이념과 독립에의 의지만은 평가해야지요. 북한은 또 임시정부는 무력항쟁을 하지 않고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에 붙어 우리의 독립을 구걸했다면서 이승만을 비롯한 외교적 독립운동을 아주 깍아 내리고 있지요. 심지어 국제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낸 것도 비난하고 있지요. 외교적 노력을 우리 민족의 존엄을 훼손했다고 평가하는데 잘 못 본것이죠. 독립을 하는 데는 총을 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외교로 하는 사람도 다 있는 것이지요. 독립운동이야 말로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하는 것 아닙니까?

북한은 외교적 노력만 했다고 비난하지만 임시정부에서는 무력항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잖아요?

임채욱 선생: 임시정부 산하 무력단체들은 실제 총을 들고 싸웠지요. 총을 들고 일제에 대항하는 전투를 치루지 않았다고 욕을 하지만 임시정부도 1940년 9월에는 광복군을 조직해서 중국과 인도 그리고 버마전선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써 전투하면서 일제가 통치하는 조국에 진공하겠다는 계획도 세웠습니다만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그 뜻이 이뤄지지 못한 거지요. 또 북한이 임시정부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 중에는 공산주의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건 이렇지요. 임시정부 초기에는 노령정부 대표 이동휘 등이 참가했지만 이들이 등을 돌린 후 공산주의자들은 빠졌으나 뒤에 김원봉 같은 사회주의자 계열의 독립투사들은 임시정부 밑에서 독립투쟁을 함께 했지요.

임시정부를 광복과 관련시켜서 평가한다면?

임채욱 선생: 임시정부는 27년간 존속했지요.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한 후 상해에서만 있지 못하고 일제의 압력으로 상해를 떠나 항저우(杭州), 전장(鎭江), 창사(長沙), 광둥(廣東), 류저우(柳州), 치장(綦江), 충칭(重慶)으로 옮기게 되지요. 이 얼마나 힘든 일이였겠습니까? 그래도 이 과정에서 앞에서도 말했듯이 광복군을 창설해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과 함께 중국, 인도, 버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한 편 중국정부를 통로로 해서 독립에 대한 열강들의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지요. 카이로선언, 포츠담선언, 얄타회담 등에서 조선의 독립을 언급하게 된 것이 다 이런 노력의 결과지요. 어떻든 임시정부는 우리나라 사람 전체의 이념적 정부로써 독립운동을 통할했고 직접 광복군을 만들어 싸우기도 했으며, 국제무대에서 우리민족의 염원을 알리는 노력으로 광복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풍찬노숙하면서 광복에의 의지를 불태우던 그 노심초사의 애씀만이라도 크게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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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