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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통일문화산책(남북한의 이중과세 모습

설날을 맞아 평양에서 아이들이 팽이돌리기를 하고 있다.
설날을 맞아 평양에서 아이들이 팽이돌리기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설이란 말은 우리말입니다. 설은 설다, 낯설다 에서 온 것입니다. 왜 낯서냐고요? 설은 새로 시작하는 어떤 시간의 첫날이기 때문입니다.

백과사전 위키백과에 설날은 추석과 더불어 한국의 명절 중의 하나로 음력 1월 1일을 설이라고도 한다. 설날에는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친척이나 이웃 어른들에 세배를 하는 것이 고유의 풍습이다. 그믐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샌다고 하여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의 15일 동안을 정초라 하며, 이 기간 동안 행하여지는 여러 풍습이 전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설날을 맞아 통일문화산책 오늘도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합니다. 양력설이 지난 지 스물 이레. 또 설이라고 하니 어느 것이 진짜 설인지 헷갈려지기도 하는데요?

임채욱 선생: 말하자면 이중과세 때문이겠는데, 우리 민족이 음력을 썼을 때는 설이라면 당연히 음력 정월 초하루 날이 설이었지요. 하지만 조선 고종 때 양력을 쓰면서부터 양력 정월 초하루 날도 설날이라고 하게 된 거지요. 지금은 양력 설날, 음력 설날이라 해야겠지만 대체로 음력 초하루만을 설이라 하지요. 양력 초하루 날은 새해 첫날, 또는 신년 초하루라고 말하는 편이지요.

새해 2017년도 벌써 한 달이 다 돼 갑니다. 그런데 동지부터 치면 새해가 시작 된 지 벌써 한 달이 훨씬 지났다고도 하더군요. 무슨 말씀인지요?

임채욱 선생: 아, 네. 새해를 동지 날부터 친 것이군요. 새해를 동지부터 치는 관습이 있었지요. 고대 중국에서 주나라는 설날이 동지 날이었어요. 이 관습을 이어받아 동지가 새해 첫날이라는 관념을 가지기도 했고 지금도 가진 사람도 있답니다. 우리나라 왕들도 동지 날이 되면 새해 달력을 신하들에게 내렸다고 하지요. 지금도 주역을 신봉하는 일부 사람들은 동지부터 새해로 보고 있지요. 또 있어요. 입춘을 새해로 보는 무리도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연구하는 명리학, 쉽게 말해서 사주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날씨가 따뜻해지는 입춘을 새해 첫날로 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설은 양력설과 음력설 두 가지라고 보면 되지요.

설이란 말은 어떤 뜻을 품고 있습니까?

임채욱 선생: 설이란 말은 우리말입니다. 설은 설다, 낯설다 에서 온 것입니다. 왜 낯서냐고요? 설은 새로 시작하는 어떤 시간의 첫날이기 때문입니다.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 날은 달이 아주 이지러진 상태에서 맞게 되는데 묵은해와 헤어지면서 새로 맞는 첫날이어서 마음을 가다듬어야 되지요. 그래서 새해 첫날을 삼가는 날로 보는 것입니다.

한자로는 삼갈 신(愼)을 써서 신일(愼日)이라고 하지요. 우리 말 중에는 한자말에서 온 것도 많지만 해와 달, 하늘, 땅, 사람처럼 아주 중요한 것은 우리말입니다. 설도 그렇게 보면 아주 뜻있는 말이지요. 설날 가졌던 삼가고 조심스런 마음은 달이 완전히 차오르는 보름이 돼 가면서 점점 즐겁고 흥겨운 마음으로 바꿔져 가지요.

우리 민족이 음력설을 쇠다가 양력설을 쇠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임채욱 선생: 조선조 고종 32년, 조선조 개국 504년이 되던 해 음력 9월에 고종이 조칙을 내리기를, 조칙은 왕의 명령을 알리는 문서를 말하죠. 이 조칙에 두 달 뒤가 되는 음력 11월 17일을 기해서 양력을 쓰기로 하는데, 바로 이날 11월 17일이 양력 1월 1일로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음력 11월 17일은 조선조 개국 505년 첫날이 되고 고종 33년 첫날이 되는데 새로 연호를 정해서 건양 1년 초하루가 되었지요. 단기를 쓰지는 않았지만 단기로 치면 4229년 1월 1일이고 서기로는 1896년 1월 1일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딱 121년 전 일입니다.

그때부터 양력설만 쇠게 된 것인가요?

임채욱 선생: 바로 이 날 그러니까 양력 정월 초 하루날 고종은 몇 달 전에 불행하게 죽은 왕비 명성황후 빈소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외국 사신들을 맞아서 신년하례식도 했지요. 왕궁에서도 공식적으로야 양력을 써야 했지만 생일이라든가, 왕으로 즉위한 날 등은 한동안 음력으로 지내기도 했습니다. 왕조가 태어난 날은 중요한 기념일인데 조상보기에도 이런 날을 양력으로야 차마 못할 일이지요. 그러나 고종이 물러나고 순종이 왕으로 오른 뒤에는 고종임금의 생일, 기념일을 다 양력으로 바꿔 버립니다. 음력 7월 25일 생일행사를 하던 고종 생일이 그만 양력 9월 8일로 바뀌었지요. 이처럼 왕궁에서는 양력을 쓰면서 설도 양력설을 쇠었지만 민간에서는 결코 양력설을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종래대로 음력설을 고집했다는 거지요. 그건 일제에 의해 나라가 침탈된 뒤에도 마찬가지였지요. 일제가 음력설을 못 쇠게 하려고 온갖 짓을 했지만 음력설을 쇠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요.

그런데 정작 해방된 남북한에서 음력설이 거부된 사연은 어떻게 됩니까?

임채욱 선생: 광복 후 남쪽에 미군정시기에는 서기를 사용하면서 양력을 썼고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단기와 서기를 사용했지만 역법은 역시 태양력을 썼기에 양력설을 쇠게 했지요. 그 뒤 1961년부터 서기를 정식 연호로 사용하게 되고 양력설이 정식 설이 됩니다. 이때쯤 되면 일제시대, 즉 민족항일시기에도 음력을 쇠던 가정도 양력으로 많이 옮겨가지요. 그런데 1985년 민의를 받든다는 명분으로 음력 설날을 ‘민속의 날’로 정하고 하루 쉬게 했지요. 그러다가 여론에 따라 1988년 음력설로 정식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양력설 3일 놀던 것을 음력설에 3일 놀게 되니까 다시 음력설을 쇠는 집들이 늘어났지요. 지금은 한국 가정 8할쯤이 음력설을 쇠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북한에서는 어떠했습니까?

임채욱 선생: 북한에서도 음력설을 억제했지요. 주민들이야 음력을 쇠고 싶었지만 당국에서 철저하게 막았지요. 분단 후 북한도 태양력을 쓰고 서기를 받아들였는데 음력설을 쇠게 할 수는 없지요. 그러니까 나이 먹은 사람들이 사라져 갈 무렵까지, 광복 당시 10대이던 사람들이 노인이 되어가던 19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음력설이 부활하게 됩니다. (전에도 한 번 이야기 했습니다만) 남북대화를 한다고 남북한을 오고 가던 그 시기에 당시 통치자이던 김정일이 음력설 부활을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인민들이 전통적으로 쇠여 오던 음력설을 크게 쇠도록 하자고 합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기민족이 창조한 우수한 전통을 귀중히 여기고 보존하며 발전시켜 나가는 데서 표현됩니다” 이렇게 말한 것이 1989년 1월 29일입니다. 이 때 북한은 조선민족제일주의가 등장해서 주체사상과 우리식 사회주의를 내세워 자체의 힘으로 건설을 다그치려고 민족을 내세고 있었지요. 이에 따라 민족전통과 관계되는 설도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음력설을 쇠게 되는 것은 한 참 뒤가 됩니다. 왜냐하면 설을 정말 즐겁게 지낼 경제사정도 있고 선뜻 지내기도 뭣해서 지연되고 있었지요. 그에 김정일은 10년도 더 지난 2003년 다시 한 번 지시하기를 양력설 대신에 음력설을 기본명절로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음력설을 사흘 쉬게 합니다.

남북한 다 음력설을 극구 말렸는데 그 때 모습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겠군요?

임채욱 선생: 남쪽에서는 음력설날 관공서가 사무를 보는 것은 물론 학생들도 등교를 하도록 했지요. 1950년대 말쯤에는 상가도 문을 열게 하고 어린이들 설빔도 못 입게 막기도 했지요. 하지만 아이들은 억지로라도 때때옷 설빔을 해 입고 놀러 다니고 했지요. 북한에선 아예 설이란 개념 자체를 양력으로 옮겨서 달력에 표시도 안됐으니까 음력설이란 개념 자체를 잊어갔지요. 남북한 당국은 다 음력설을 쇤다는 것이 즉 음력을 고집한다는 것이 세계적인 시선으로 볼 때 뒤떨어진 행위로만 본 것이지요. 문화의 특수성보다 보편성에 맞추려는 행위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란 시각을 가지지 못하던 때 이야기지요.

참고로 이웃 일본과 중국엔 음력설이 어떻습니까? 2중과세가 바람직합니까?

임채욱 선생: 음력설은 우리나라와 중국만 쇠고 일본은 없애버리고 부활을 안 시켰습니다. 중국도 1912년 당시 총통이던 손문이 음력설을 없앴는데 2년 뒤 춘절이란 이름으로 다시 부활하지요. 그러다가 1928년 장개석은 또 춘절을 폐지하지요. 중공정부는 1949년 정부를 세우자 공식적으로는 양력을 사용했으나 춘절에 3일간 공휴일로 지정했지요. 2중과세가 된 셈이지요. 하지만 문화혁명기간(1967~1976)에는 춘절도 쉬지 못하고 모택동 초상 밑에서 상호 비판과 자아비판을 행하는 모습도 보였어요. 그러다가 1980년에 다시 부활되고 1983년부터는 춘절이 중국사람 본래의 음력설로 돌아왔지요. 양력설, 음력설을 2중으로 쇠는 2중과세가 나쁘지만은 않지요. 양력설에는 공식행사를 주로 하면서 새해 인사를 하고 음력설에는 집안이나 친척들과 복을 비는 인사를 나누면 좋은 일이지요. 그리고 양력설, 음력설 할 게 아니라 양력 새해 첫날은 신정이고 음력 정월 초하루 날만을 설날이라 부르면 좋겠군요.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