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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광복의 달, 애국자들

서울 중구 손기정체육공원에서 열린 손기정 마라톤 우승 80주년 기념 동상 제막식 및 경관조명 점등식에서 참석자들이 동상을 살펴보고 있다. 조각가 배형경 씨가 제작한 2.4m 높이의 청동재질 동상은 1936년 시상식 당시 손 선생의 모습에서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달고 있는 '대한민국 마라토너'로서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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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손기정은 베를린 우승 때 무슨 이유로 못 받았던 그리스 청동투구를 50년 만인1986년 돌려받자 자기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것이라면서 바로 나라에 기증했습니다.

8월입니다. 광복의 달, 8월이면 생각나는 수많은 애국지사, 우국열사들이 떠오릅니다. 항일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운 독립군도 있고, 원수를 처단하려 뛰어든 열사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애국의 길에 몸과 마음을 보태려고 애쓴 평범한 애국자들도 많습니다. 오늘은 평범한 애국자들 이야기로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과 함께 합니다.

임채욱 선생: 네, 8월이면 참으로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애국열사들이 많이 떠오르지요. 항일애국의 길에는 반드시 총을 들고 싸우지 않았더라도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나름대로 애국을 했다고 보겠습니다. 자기 능력이 다하는데 까지 애국의 마음을 가진 평범한 애국자도 많았습니다.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이나 비행사 안창남, 자전거 왕 엄복동 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애국자라고 봅니다.

아, 손기정! 그리고 안창남과 엄복동! 그들 이름을 압니다. 그런 분들도 정말 애국자이지요. 오늘 이 시간 이 분들 이야기를 나눠보지요.

임채욱 선생: 손기정, 1936년 베르린 올림픽대회 때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했지요. 그간의 올림픽 기록을 깨고 우승해서 고국에 있는 국민들에게 민족적 자부심을 안겨줬지요. 그런데 가슴에 있는 일장기 때문인지 시상식 때 월계관을 건 목이 숙여져 있어서 몹시 비감해 보였지요. 그 때 그 모습에, 그의 심정을 공감한 동아일보 기자들이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립니다. 일장기 없는 사진이 신문에 실리지요. 이에 총독부당국은 이를 트집 잡아 신문을 무기정간 시킵니다. 해당 기자들도 구속돼서 고초를 겪었지요.

안창남 같은 분도 애국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임채욱 선생: 네, 안창남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였습니다. 안창남은 민족항일기 그 시대, 어두운 세월을 살던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준 큰일을 해냅니다. 일본에서 비행사가 된 뒤 항공대회에서 2등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1922년 12월 동아일보사가 그를 서울에 초청합니다. 흔쾌히 응한 그가 5만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 여의도에서 하늘을 납니다. 며칠 뒤에는 인천하늘까지 날아갔다가 돌아오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비행사가 돼서 우리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감격 안할 수 있습니까? 그보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는 바로 애국심이 우러나는 것이였습니다. 모국의 하늘을 난 소감을 묻자 서울은 일본 도꼬보다 작지만 몹시도 깨끗하고 어여뻐 보인다고 말합니다. 3년 뒤 안창남은 상해로 갑니다. 국외로 탈출한 것입니다. 상해임시정부를 찾아서 활동하려고 한 것이지요. 그 때 상해임시정부는 비행기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전단을 국내에 뿌리려는 계획을 합니다. 이런 계획에 호응하려고 한 것인지 안창남은 상해임시정부를 찾습니다. 그런데 그 때 임정은 자금 때문에 비행기를 마련도 못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안창남은 장개석 정부 항공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하게 됩니다. 뒤에 항공학교 특별비행교관으로 있던 그는 비행기 추락사고로 뜻하지 않게 서른 살 한 창 나이에 목숨을 잃습니다.

안창남은 어찌보면 평범한 애국자가 아니라 우뚝한 애국자인 것 같습니다. 그럼 엄복동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임채욱 선생: 네, 엄복동은 자전거 선수입니다. ‘하늘에 안창남, 땅에 엄복동’이란 유행어의 주인공입니다. 안창남보다는 8살이 많은데 21살 때인 1913년 4월 전조선 자전거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비롯해서 경기에 나설 때 마다 우승을 해서 나라 빼앗긴 우리국민들을 환호하게 했지요. 그는 안창남처럼 독립운동에의 의지를 불태우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름 하나만으로 민족의 기상과 자긍심을 북돋아 준 공로가 있습니다. 자전거 대회 때마다 일본선수들과 싸웠으니까 언제나 민족의 한을 씻으려는 기개를 안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광복 후 한국에서는 그의 기상을 기려서 1977년부터 엄복동배 쟁탈 자전거 대회도 열어 왔습니다.

손기정, 안창남, 엄복동 같은 분들은 일본에 압박받던 그 때 한국국민들에게는 영웅과도 같은 존재일수 있습니다. 이들의 공로가 광복을 가져오게 하는데 보이지 않는 밑거름이 된 것도 사실이겠지요.

임채욱 선생: 그렇습니다. 그런데 손기정 외에 다른 두 사람은 일찍 죽고 불행하게 죽었습니다. 손기정은 광복 후 한국 육상계 뿐 아니라 체육계 지도인사로 활동하다가 91세에 병원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별세 후에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고 대전 현충원에 유택이 마련됐습니다. 1992년 8월 서울올림픽 4년 뒤에 열린 스페인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한국선수 황영조 선수가 일본선수를 물리치고 1등을 할 때 그는 현장에서 황선수를 열렬히 응원했습니다. 자기가 딴 금메달은 일본국적으로 됐지만 대한민국 선수로 황영조 선수가 처음으로 금메달 주인공이 되기를 바래서 모든 애정을 쏟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때 여자 마라톤 우승은 북한선수 정성옥이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임채욱 선생: 창공에 독립의 꿈을 펼치려던 안창남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됐는데 훈장을 받을 후손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유념할 부분은 안창남보다 먼저 미국에서 우리나라 사람 비행사들이 양성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독립운동 하던 노백린 열사가 미국에서 항공학교를 세우고 한국사람 조종사를 길러내고 비행기도 마련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안창남을 최초 비행사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 엄복동은 6.25때 의정부 부근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실로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노래로 불리던 주인공의 불행한 최후였습니다.

이들 애국심에 불타던 분들에 대해서 북한에서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임채욱 선생: 평가가 박하지요. 북한 신문이나 잡지에서 마라톤 관련기사에서도 베르린 올림픽에서 조선선수들이 1등과 3등을 했다고 설명하면서 손기정 선수 이름은 밝히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일장기 말소사건’을 언급하면서 이름만 거명되고 있습니다. 안창남이나 엄복동은 아예 이름도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학생이나 일반주민들은 손기정은 이름 정도를 알아도 안창남이나 엄복동에 대해서는 들은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게 민족항일기 애국자를 보는 남북한의 차이라고 보겠습니다. 북한에서는 애국자라면 김일성과 같이 싸웠다는 사람을 빼고는 누가 있는지, 애국자의 범위가 굉장히 협소하게 평가되는 면을 봅니다.

북한에선 애국자이건 아니건 민족항일기를 살았던 한 인간, 이름이 난 인사를 외면한다는 것은 왜일까요?

임채욱 선생: 아마도 출신성분 문제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활동을 남쪽에서 주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잘난 모습은 남북 민족 전체가 배워야 합니다. 특히 손기정은 베를린 우승 때 무슨 이유로 못 받았던 그리스 청동투구를 50년 만인1986년 돌려받자 자기의 것이 아니라 민족의 것이라면서 바로 나라에 기증했습니다. 오늘 세계적인 축구선수 손흥민은 세계에 나 손흥민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알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손기정의 거룩한 정신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정신적인 유산은 중요한 것입니다.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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