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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0)-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0)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앞서 <환단고기>를 위서로 보는 이유 중 그 첫째가 “<환단고기>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책이다였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대종교에서는 <신단민사> <천부경> 등 단군이나 고대사와 관련된 책들을 많이 펴냈다, <환단고기> 역시 그 중의 하나가 아닐까? 라는 의혹을 품는다는 것이다.

종교적이라거나 대종교와 관련돼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으로 신뢰할 수 없는 책, 간단히 위서라고 단정해 버린다면 <환단고기>를 쓰면서 참고로 하였다는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4종의 사서마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종교적인 필요에 의해서 고대의 역사를 전승시켰을 경우라 해도 윤색, 첨삭 가능성 이상의 진위 논란은 바람직 한 태도는 아닐 것이다.

 

‘<환단고기>는 위서다고 주장하는 두번째의 근거로서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의 묘지 내용을 든다. “남생의 묘에서 출토된 비석을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 <환단고기>에 실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책이 1923년 이후에 쓰여졌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인데 그 관련 내용을 보자.

 <환단고기> <태백일사> 중 고구려국 본기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조대기>에 가로되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 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太祖)라고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라고 하고, 증조부는 광()이라고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묘비에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까지 만 새겨 있는데 비해 <환단고기>는 증조부와 증조부의 이름까지를 기술 하였다, 만약 1923년 천남생의 묘지가 발굴된 이후에 그 묘비 내용을 보고 썼다면 구태어 비문에도 없는 증조부와 어느 기록에서도 보이지 않는 이름 광()까지를 기록할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것은 초보적인 질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천남생의 묘지가 발굴된 것은 1923년이지만 이것이 활자화 되어 알려진 것은 12년이 지난 1935년이었다. 이유는 1919 3.1 독립만세 사건 이후 민심이 뒤숭숭한 때였고, 더하여 조선총독부는 만세사건의 원인이 조선인들의 민족주의에 있다고 보고 역사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계획을 구체화 했다. 그 일환으로 조선총독부에 조선사편수위원회를 창설하여 적극적인 조선 역사의 말살 및 왜곡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1923년 중국의 하남성에서 발굴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의 묘지는 조선총독부의 입장에서 일급비밀에 해당하는 사건이었으며, 그래서 천남생 묘지의 탁본이 엄정하게 관리되었고 그 탁본의 소유자가 한국 고대사 말살의 주인공인 이마니시 류(今西龍)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의 근거로서 (이하 필자 주: 성삼제의 사라진 역사’ <고조선>에서는 연남생의 이름 자리에 천남생이라고 여러 번 기술하고 있으면서 그에 대한 설명이 없음) 연남생(淵南生) 묘지의 비석에 자기의 성인 연()자를 쓰지 못하고 천남생(泉南生)의 천()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을 세운 당태조(당태종 이세민의 아버지)의 이름이 이연(李淵)이므로 태조의 이름자 못 연()자를 사용할 수 없다는 때문이었으며 그래서 못 연()자 대신 샘 천()자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죽어서조차 자기 성을 사용치 못했는데, 이러한 내용이 <환단고기>에 전혀 언급이 없다는 것은 이 묘비의 내용을 본 뒤 복사하였다는 주장이 억측일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오히려 남생의 묘비를 통해서 <환단고기>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합당하겠다.

당시 고구려와 당이 격돌하던 요동지역보다 훨씬 내륙에 있는 하남성에서 발견된 연남생의 묘비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더 담고있다. 묘비문 탁본 여섯째 줄에는 요동군 평양성 지역 출신 사람이라고 되어 있어 대동강 변의 평양만을 고집하는 분들에게 요동의 평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곁들여 평양성은 고유명사가 아닌 수도 또는 서울과 같은 보통명사라는 것을 인지해 주기를 바란다.

 

<환단고기>의 위서 논란에 대한 세번 째의 반증 자료로서 발해 정혜공주의 묘지에 새겨진 내용을 제시한다.

공주는 우리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의 둘째 딸이다. 생각건데 고왕, 무왕의 조상들과 아버지 문왕은 왕도를 일으키고 무공에서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고 능히 말할 수 있으니…”

이처럼 정혜 공주의 묘비에는 윗대의 공적이 기술되어 있는데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대목은 공주 아버지의 연호이다. 대흥(大興)은 발해 3대 문왕의 연호인데, 문왕의 연호가 대흥이라고 기록한 책은 <환단고기>밖에 없다는 것이다. 곧 역사 지식이 환단고기의 저자보다 뛰어난 자가 조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내용들을 담아내고 있는 책이 곧 이 책이라는 결론에 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