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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1)-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1)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이유립이 필사한 환단고기의 진위여부가 사학계의 위서논쟁을 일으켜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환단고기의 원본이 발견되어 논쟁에 종지를 찍을 수 있다는 기대가 우리를 설래게 한다.

 

<환단고기> 1911년 계연수 선생이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등을 엮어 30부로 출간 하였으나 일제 총독부의 사료말살 계획에 의해 자취를 감추었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환단고기>는 이유립 선생이 오형기 씨에게 필사하게 하여 공개한 것으로 그동안 원본 없는 이 필사본이 진위논쟁을 일으킨 셈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원본이 숙명여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고 원본확인 작업을 통해 1911년 계연수에 의해 간행되었던 원본임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 KBS 송지영 이사장이 1989년 숙대 50주년 기념으로 기증 했다고 한다.

 

한민족의 고대역사 자료 <환단고기> 원본 발견- 위서논쟁 종지부 찍을듯

우리 민족의 그 뿌리는 무엇인가,

수십만권의 역사 장서들이 중국과 일본에 의해 왜곡되고 사라졌으나, 한국의 뿌리 역사에 진실을 찾을 수 있는 문헌이 현존하고 있었으니 북애노인의 <규원사화>와 계연수의 <환단고기> 외에 삼국유사, 고조선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우리가 역사의 진면목을 알고나서 읽어야 비로소 유익한 책이다. 삼국유사는 불교의 안목으로 윤색되어 우리 역사의 시원의 전모를 바로 파악 하기에는 난해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나 껍질을 베껴내고 속을 들춰내다보면 깊은 곳에 진실이 자리하고 있음을 엿볼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료로서 소중하다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환단고기>의 진위 논란의 검증을 위한 사료들을 예로 들어 오던 중 <환단고기> 원본의 발견의 소식에 접했으나 예정대로 천문학의 기록을 통해서 1979  인쇄본이 배포되고 1982년 일본에서 이 <환단고기>가 발간된 이래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번역서가 나와 100만 권 이상이 팔렸다고 하는 <환단고기>의 진위여부를 진단해 보기로 하자.

역사 전공자라도 읽기에 쉬운 책은 아니지만 전공자 아닌 일반독자들이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이 책을 읽었을 것인데, 한두 사람의 조작이나 창작으로 이러한 역사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길 것이다.

이제 천문학의 기록과 썰물에 관한 기록을 보자

1993 <한국상고사학보>에 박창범 전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교수의 단군조선시대 천문 현상 기록의 과학적 검증이라는 논문이 발표되어 역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이하 성삼제의 사라진역사 <고조선>’에서 간접인용 한다.

 

박교수는 단군조선이 과연 존재했는지, 그리고 존재했다면 그 위치는 어디인가라는 의문을 천문학으로 풀었다. 단군조선의 역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된 <단기고사> <환단고기>에 실린 <단군세기>가 주 연구 대상이었다.

이 두 책에는 천문 관련 기록이 60개가 실려 있었고 과학적 계산으로 확인 가능한 기록은 일식과 오행성 결집, 썰물 현상 등 12개였다. 그 중 단군조선 13대 단군 흘달(屹達) 50(기원 앞 1733)에 기록된 오행성 결집 현상에 주목했다.

<단군세기>의 기록은 [무진 50(기원앞1733)에 오성(五星)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였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3700년 전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5행성이 모여들었던 진귀한 천문 현상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인간의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는 5개의 별이 한꺼번에 모이는 이른바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은 약 250년마다 한 번 정도 일어난다고 한다.

 

박창범 교수는 기원 앞 1733년을 전후로 하여 눈으로 볼 수 있는 다섯행성(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의 위치를 계산, 확인하여 그 다섯행성이 매우 가깝게 모이는 때는 기원앞 1953년과 기원앞 1734 7 13일 초저녁(10도 이내)인 것을 찾아냄으로 불과 1년의 차이로 실제 현상이 일어났음을 입증하였다.

그래서 혹시 <환단고기>편찬 과정에서 중국의 기록을 베끼지 않았을까 의심할 수도 있어 오성취루 현상에 관한 중국 최초의 천문기록을 검토한 결과 중국 최초의 천문기록은 기원앞 700년대로서 1000여년 뒤늦은 기록임이 드러났다.

 

그다음으로 박창범 교수는 <단군세기>에 나오는 단군조선 제29세 단군 마휴 때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연구하였다.

[무인 원년(기원앞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을유 8(기원앞936) 여름 지진이 있었다. 병술 9(기원앞 935) 남해의 조수가 3척이나 물러갔다. 신해 34(기원앞 910) 마휴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내휴가 즉위하였다](임승국<한단고기>)

박교수는 기원앞 935년을 전후한 200년 간의 해와 달의 위치를 확인하고, 이들이 지구에 미친 조석력을 계산하여 기원앞 931년에 가장 강한 조석력이 발생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더 상세한 것을 알기 위해서는 박창범의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를 탐독해볼 일이다.

<환단고기>의 이 옛기록과 실제 현상이 이정도의 근소차를 보인다는 것은 기록의 진실성을 여실

히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1675(숙종 2) 북애노인이 한국상고사를 기록한 <규원사화>의 진위 논쟁에 관여해보자,

<규원사화>가 위서일 가능성이 있다고 처음 주장한 송찬식 교수나, 좀더 강하게 위서라고 주장하는 조인성 교수의 주장은 무엇이고, 사대주의에 빠진 조선의 역사서를 보며 조선에 국사(國史)가 없다는 것이 큰 걱정이라며 목메어 탄식하던 북애가 40여 권의 사서를 참고로하여 썼다는 이 책의 진면목은? 논쟁을 결코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자. 건전한 논쟁은 건전한 문화를 창출하고 생성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