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2)-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2)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내가 우습고 가엾게 여기는 것은 근세의 학자들이 한적(漢籍: 한나라의 서적)에 얽매이고 유학(儒學)에 빠져 멍청하여 지더니, 스스로를 외이(外夷:바깥 오랑캐)라 달게여기며 중국을 받드는 것이었다.

어느 성대한 잔치자리에 갔을 때에도 이런 우스꽝스러운 말들이 오고가는 것을 보고, 내가 취중에‘너희들 이 중국과 오랑캐를 말하지만….우리의 선조들은 상고 때부터 강하고 용맹스러우며 성질 또한 곧고 바르며 예절을 지키고 양보하기를 좋아하여 중국에서도 “동방에 군자의 나라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어찌 근본 이 융적의 무리와 같겠는가, 압록강 바깥 사방 만리 땅은 우리 거룩한 선조들이 고생 하며 경영하던 땅인 데, 어찌 본래 부터 한나라 땅이겠는가, 공자 시대에 주()나라 왕실이 이미 쇠하고 외족이 침입하여 여 왕(勵王)은 융적에게 패하여 죽고 북적(北狄), 형만(荊蠻), 산융(山戎), 무종(無終) 등 족속 들의 침입이 그치지 않앗다.

우리 겨레는 이 때 그 위엄이 널리 퍼졌다. 때문에 공자가 왕정이 널리 퍼지지 못하고 여러나라가 번갈아 침입하는 것을 슬퍼하여 <춘추>를 쓰려 하였다. 이때부터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밀친다는 말이 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공자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중국을 가르켜 융적이라 하지 않았겠는가,라고 하자 좌중이 혹은 놀라고 혹은 비웃기도 하는데 나는 불쾌함을 이기지 못하여 상을 차고 일어나자 좌중의 사람들 이 모두 나를 미친놈이라고 했다. 나는 정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 내용은 북애<규원사화>에 나오는 일화로서 300여년 전의 사회상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어서 옮겨 와 봤 다.  <규원사화> 1675년 북애에 의해 저술되어 300년 동안이나 금서로 묶였던 책이며 이 책 또한 위서 논 쟁에 휩쓸렸던 책이다.

<규원사화>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논지를 가장 활발하게 펼치는 조인성 교수의 지적에 대해 그 하나 하나를 검증해 나간 성삼제의 반론 중 “문화”의 시원에 관한 사항만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규원사화> <단군기>에 등장하는 ‘문화’라는 단어도 논쟁의 대상이다,

조인성 교수는 <규원사화>의 단군기에서 ‘문화’라는 말이 영어 Culture에 해당하는 현대적 의미로 사용 되었는데, 이 말은 20세기 초 일본에서 수입 되었으므로 <규원사화>는 근대에 와서 쓰인 것으로 봐야 한다] 고 주장했다

여기에서는 단군고기의 내용 중 ‘문화’라는 단어가 들어간 원문이나 위 조 교수가 예문을 들어 문화가 일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는  예문 내용들은 생략하고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문화’ 라는 용어를 사용했는지를 보겠다.

숙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경종이 반포한 교서에 ‘문화’가 등장한다.

[오직 대행대왕께서는 크게 이어받고 널리 나타내시어 지극한 조행은 하늘에서 품부했으니, 효성이 신명에 통하였고, 다스리는 방도가 날로 승평하여 풍교가 온 나라에 미쳤도다, 유도를 숭상하여 문화가 크게 밝아 지고 (崇儒重道而文化大闡) 윤리를 닦아 기강이 바로 섰도다.(1720 6 13일 경종이 즉위 하여 반포한 교서 중 에서…)] 또 황해도에는 조선 초기부터 문화라는 지명이 있을 만큼 문화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이다며 문치교화(文治敎化)라는 의미로 사용 되면서 자연스럽게 고유문화라는 의미가 생겨났다고 볼수도 있다고 하겠다. 이렇듯 역사서의 문장이나 단어를 놓고도 논쟁을 벌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이 학자의 편협한 사관(史觀) 또는 개인적인 성향에 의해서 역사가 달라지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거듭 강조 하거니와 역사라는 것은 진실이어야 하며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즉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뀔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역사가 외적의 침략에 불타 인멸된 것 말고도 중국 사가들의 춘추필법이라고 해서 중국을 높이고 존중하며 주변국가들을 오랑캐라고 천시하는 존화황국사관(尊華皇國史觀)에 빠져 그들의 수치스러 운 역사는 모조리 없애버렸을 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역사를 위조, 날조한 것으로부터 사대모화주의자, 즉 중국을 대국이라 흠모하는 자들에 의한 위조와, 전국을 누비며 조선의 사서 전체를 불태워버린 일본(자기 들의 망상을 충족 시킬 만한 몇 몇 역사서는 남겨둠)의 역사 말살과 왜곡과 윤색 등의 수난, 그리고 불교, 유교 등 종교에 의한 윤색이 더하여져 우리들을 역사의 혼란 속에  빠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정사라는 <삼국사기>의 맹점  몇 가지만을 간추려 옮겨본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仁宗 1123~1146) 때 독실한 유학자 김부식에 의해 쓰여진 책이다.

<()나라 역사책에 얽매이고, 유학에 빠져 중국 공자가 우리를 오랑캐라 말함을 스스로 달게 여기고, 기자 (箕子)가 귀화 했다는 것도 무조건 믿으며, 한무제가 토벌 했다는 것도 믿는 황국사관에 의해 쓰여진  김부식이 이 책을 엮으면서 변명하기를 “해동삼국은 역년이 장하구나 옛날에는 기록할 문자가 거칠고 옹 졸해서 사적이 다 빠지고 없어져 지나간 일이 희미하다”고 했는데, 이는 부질없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기(古 朝鮮秘記), 지공기(誌公記), 삼성비기(三聖秘記) 등을 300 년 후 인 조선 제7대 세조가 구하려 한 기록이 있고, 1911년 계연수께서 환단고기를 쓰면서 삼성기, 단군 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 4종의 사서를 하나로 엮어 만든 책이라 했으며, 또 규원사화는 1675 년 북애께서 40여 권의 사서를 참고로 하여 썼다고 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바탕이 된 진역유기는 공민왕 때의 학자인 이명(李茗)이 쓴 책으로 그는 또 조대기(朝代記)를 보고 썼다고 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하겠는가,            

다음은 독실한 불교 승려인 일연의 삼국유사의 억측과 억설에 관한 기사 몇구절을  제시해 보겠다.

삼성밀기(三聖密記)나 조대기(朝代記)에는 웅족(熊族), 호족(虎族), 또는 양가(兩家)라고 되어 있는 것을 삼국 유사에서는 족()자와 가()자를 빼버리고 곰(), ()이라고 했고, ‘함께 이웃에 살았다’ (同隣而居)함께 굴에서 살았다’(同穴而居)한얼님의 계율을 잘 지킬 수 있는 착한 백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願化爲天戒之珉)원컨데 사람으로 되게 하여 주옵소서’(願化爲人)다시 참 사람이 되어 큰 일을 할 수 있는 대인이 될 것이다’(更得踐形之大人者)다시 사람의 모양을 얻을 것 이다’(更得人形)으로 건전 하고 씩씩한 아릿다운 여인을 얻었다’(得健資之容)곰은 여자의 몸 을 얻었다’(熊得餘身)마침내 하늘 사업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終不得與之贊天業)는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而不得人身)라고 고쳤으니 어찌 이보다 더하게 우리 정사를 변위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완전한 신화로 전락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