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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9)-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9)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환단고기><삼성기>하편의 기록을 보면 중국의 사기에서는 탁록의 전투에서 황제 헌원이 승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내용까지 기술 하면서 아홉군데의 야금소에서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만든 병기를 만들었고,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진 자우지환웅(치우천왕)이 능히 안개를 일으켰으며 천하가 두루 두려워 하였다.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여기서는 치우란 우뢰와 비를 크게 일으켜 산하를 바꾼다는 뜻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40여 중국의 역사책에 언급된 치우천왕의 기록에 비해 정작 우리의 역사책에는 그 기록이 없다는 아이러니, 그나마 치우의 기록이 대체로 상세한 <환단고기> <규원사화>는 위서(僞書), 아니다 진위(眞僞) 논란이 진행 중인데, 사학계의 주류는 위서(僞書)라고 주장하고, 민족사학 계열에서는 위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환단고기를 위서로보는 이유 그 첫째는 대종교 계통의 책이라 믿을 수 없다이다.

대종교는 단군을 교조로 하는 한국의 고유 종교다.

환웅(桓雄), 환검(桓儉), 환인(桓因)의 삼위일체인 한얼님을 신앙적 대상으로 하는 종교로서 단군교라고도 한다. 단군조선에서 부여시대에는 이 종교의 명칭이 대천(代天)이었고, 고구려에서는 경천(敬天), 신라에서는 숭천(崇天), 고려시대에는 왕검교(王儉敎)라고 불렀으며 조선시대에는 고삿날이라는 민속화 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09년 나철이 대종교를 창설했다. 이 대종교는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단군이나 고대 역사를 학문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종교적인 영역으로 다룬다면 실제 역사와는 많은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둘 일이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이렇다.

1911년 계연수가 <삼성기> <단군세기><북부여기> <태백일사> 4종의 사서를 묶어 <환단고기>를 편찬한 뒤, 제자 이유립에게 다음 경신년(1980)에 이 책을 세상에 공개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 뒤 계연수 선생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 일본인에게 피살 됐다.

그러나 이 때 엮은 <환단고기>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이유립이 1949년 오형기에게 정서시킨 필사본을 토대로 1979년 인쇄본이 발간되었다. 이후 임승국 교수가 <환단고기>를 번역하면서 자를 한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임승국 번역본의 제목은 <한단고기>가 됐다.

우리 상고사에 관한 책들 중 신라시대 박제상이 쓴 <부도지>는 우리민족의 시발지이자 인류의 시원지인 마고대성에서 분거한 후 황궁, 유인, 환인, 환웅, 임검, 부루, 읍루로 이어지는 수만 년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환단고기> 이전의 역사를 담고 있다.

1970년대 말 <환단고기> 영인본이 국내에 배포되었을 때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 못했고, <환단고기>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것은 1982년 이 책이 일본에서 출판된 이후이다. 당시 일본에서 이 책의 발간을 찬조하거나 추천한 사람은 700명이 넘었고, 국회의원, 시장, 지방자치단체 의원, 대학 학장, 기업체 사장, 도서관장, 등 수많은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포함되었다.

일본인들이 이처럼 <환단고기>에 열망한 이유는 이 책에 일본 천황의 계보가 실려있기 때문이었다. <<단군세기>>에서 제35세 단군 사벌(沙伐: 기원앞 772~705) 재위 50년의 기록에 단제(檀帝)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바다의 웅습(熊襲)을 평정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언파불합은 일본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아버지이고, 웅습은 큐슈 지역에 있던 지명이라고 한다. 이렇게 일본에서 출판된 <환단고기>가 역으로 한국에 유입되어 이후 진위(眞僞)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했던 이병도는 최태영 박사에게 “<규원사화>는 신뢰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환단고기의 진위 논쟁은 우선 우리의 상고사에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논쟁하며 옳은 것을 찾아내고 바르게 정립하는 시점이 올 것이므로 전화위복의 기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성삼재의 사라진 역사’ <고조선>의 환단고기에 채록된 연개소문의 장남 남생의 비문, 발해 정해공주의 묘지, 천문현상 등을 발췌 간결하게 정리함으로서 <환단고기>의 진위 여부를 진단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