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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7)-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7)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14세 치우천왕(蚩尤天王: 환웅 자오지)

원년. 을묘(B.C 2706)

** 자오지(慈烏支: 치우천왕)가 임금에 오르면서 백성들과 함께 신시(神市)의 전통을 계승하여 나라를 더욱 발전시켰다.

** 도읍을 청구(靑丘)로 옮겼다.

** 신농(神農)씨의 후손인 유망(楡罔)의 정치가 쇠약해지자 치우천왕은 친척 중에서 장수될만한 사람 81명의 군사를 뽑아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갈로산(葛盧山)에서 쇠를 캐어 창과 투구 등 쇠병기를 만들었다. 싸움이 시작 되자 1년 동안 9제후의 땅을 함락시켰다. 다시 병기를 정비하여 공상(空桑)을 점령하는 등 같은 해에 12제후의 나라를 함락시켰다.

 ** 치우천왕의 위세가 공상에서 떨치자 헌원(軒轅)이 병마를 이끌고 와서 싸우고자 하였다. 치우천왕은 탁록을  포위하며 큰 안개를 일으키니헌원의 군사들은 무서워 떨며 도망쳤다.

이렇게되자 왕은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淮岱)에서 집을 지었다.. 치우우천왕의 위세가 천하를 누비니 겁먹은 헌원의 무리들이 와서 공물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서쪽에 사는 사람들은 화살이나 돌(돌도끼 등)의 힘만 믿고 투구와 갑옷은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치우천왕은 구리머리에 쇠이마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어 헌원은 그 대가 끊어질 때까지 베개를 높이 베고 자지 못하였다. 그 뒤 300년 동안은 아무일이 없었다.

** 자부선생(紫府先生)이 임금께 나아가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바쳤다.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기고 청구의 대풍산(大風山) 양지바른 곳에 삼청궁을 지어 살게 하였다.

** 선생은 해와 달의 운행을 측정하고 오행(五行)의 수리(數理)를 고찰하여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안들었다. 이것이 칠성력(七星歷)의 시작이다.

** 헌원이 치우천왕을 뵈러 가는 길에 자부선생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는데 그때 교화하며 삼성내문경을 주었다. 이밖에 공공(共工), 창힐(倉詰), 대요(大撓)의 무리들도 와서 배웠다.

** 치우천왕이 계묘년에 세상을 떠나니 기원 앞 2598년이었다. 

여기서 몇몇 지명과 인물에 대한 해설을 곁들인다.

l  신농(神農): 염제(炎帝)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소전(小典), 소전은 웅씨 (雄氏) 에서 나누어졌다. 8세 안부련 환웅천왕이 소전에게 군병을 감시하라는 명을 내렸고, 그래서 강수(姜水)로 갔다. 거기에서 신농씨는 온갖 풀의 맛을 보며 의약의 체계를 세웠다. 이렇듯 환족(桓族)임이 분명한 신농씨를 우리의 사전이나 의약서 등에 중국인이라 한 것은 큰 잘못이다.

l  공상(空桑): 중국 하남성 개봉(開封)시 남쪽에 있는 진유(陣留).

l  청구(靑丘): 예부터 우리나라를 이르는 지명, 22세 단군왕검(단검 색불루) 때의 기록을 보면 청구는 남국에 있는 엄독홀에 있고 엄독홀은 은나라 가까이에 있다고 규원사화에 기록되었고, 이능화는 청구는 북경이 포함된 난하일대일 것이라고 했으며, 윤내현은 청구를 발해 북안(北岸)에 있던 지명이라고 하였다.

l  헌원(軒轅): 황제(황제), 성은 공손(공손)인데 뒤에 희()라 하였다. 치우천왕과는 탈록에서 전쟁을 치른 이후 여러 번 전쟁을 하게되는 중국 최초의 황제라는 기록도 있으며, 우리의 자부선인을 만났고 자부선인은 제발 사람이 되라는 당부와 함께 삼황내문경을 주었다. 이것이 노자로 이어져서 도교(도교)의 기초가 되었다. 도가에서는 황제를 도교를 연 조상으로 숭배한다.

l  탁록: 중국 하북성 탁록현, <마한세가>에는 산서성 대동부라고 했다. 이곳은 하북성 탁록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서 이 일대를 말한다.

l  회대(淮岱): 회수(회수)와 대산(대산), 산동성, 하남성, 강소성, 안휘성 일대.

l  자부선생: 자부신인이라고도 하며 복희씨와 함께 공부한 발귀리(發貴里) 선인의 후손이다.

황제 헌원에게 삼황내문경을 주면서 마음을 고치라고 하였다. 유위자 (有爲子)의 학문도 자부신인에게서 나왔다.

l  삼성내문경: 이것은 록서(鹿書)로 쓰여졌으며 세편(三篇)으로 나누어졌다. 후세 사람들이 여기에 주()를 달고 구분하여 신선음부설(神仙陰符說)이라 하였다. 또 도교의 기초가 되었다.

황제의 음부경도 삼황내문경의 뜻을 풀어 쓴 것이다.

이상은 주로 고동영의 <단군조선 47대사>의 내용을 인용하였는데 이 책의 뼈대는 <단기고사><환단고기> 그리고 <규원사화>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에는 단군조선사 이전의 환웅 18(기원앞 3897~기원앞 2333) 1565년 간의 신시(神市) 역사와 그 앞 환인(桓仁)씨의 나라 곧 환국(桓國: 기원앞 7197~3897)의 연대별 기록이 있으나 한웅천왕의 신시사(神市史)를 약간만 간추려 소개하고, 이 신시의 14대 치우천왕의 기록들을 중국의 사서에서 찾아 그 발자취를 더듬어 사실 여부를 확인하며 또한 위 사서들의 기록에 대한 근거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옛책들을 다 믿을수도 없지만 다 안믿을 수도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갈등이다.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믿을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바르고 틀린 것을 가려서 취하는 일이 결코 쉬운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대사를 탐구하는 일은 더욱 냉철한 학문적 태도가 요구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