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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5)-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5)

                                    <참역사문화 운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단군조선

                                       1세 단군 왕검(王儉)

*** 단군왕검의 아버지는 신시(배달나라) 18대 거불단 환웅이며 어머니는 곰족의 왕녀이다. 신묘년(기원앞 2370) 5 2일 인시(寅時)에 태어났다.

왕검은 나서부터 신성스러운 덕이 있었으며 어질고 자비하였다.

도가 천지에 두루 통하여 사람을 크게 유익하게 하는 길로 교화하니, 신시(神市)의 옛 제도가 회복되었다.

*** 배달나라 제1세 환웅천황의 개천으로부터 1565년 되는 상달 초사흔 날,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었다.

***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이름을 <<>>이라 하였다. 후에 사람들이 아사달을 왕검성 이라고 하였다.

*** 맏아들 부루(扶婁)를 태자로 세웠다.

*** 땅이 넓고 백성이 많아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진한(眞韓)은 임금이 직접 다스리고

마한(馬韓)과 번한(番韓)은 각각 왕을 두었다. 이를 삼한(三韓)이라 한다.

*** 임금과 백성이 소도(소도)에서 하늘에 제사하며 문명한 정치를 하여 백성을 평등하게 교화하

니 이웃끼리 있고 없는 것을 서로 나누며 잘못된 일은 바로잡아 주면서 서로 화목 하였다. 

*** 임금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교서 내용은 檀君八條인데 후에 따로 설명하겠다)

*** .(경인:기원앞 2311): 도읍을 송화강(松花江)가로 옮기고 평양(平壤)이라 하고 나라이름을 고쳐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 경자(기원앞 2301): 요중(遼中)에 열 두성을 쌓았는데 험독(險瀆), 영지(令支), 탕지(湯地), 통 도(桶道), 거용(),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산(碣山). 여성 (黎城)이다.

*** 홍수의 어려움을 틈타 알류가 침입하였는데 그 세력이 제법 거세었다. 곧 넷째 아들 부여( )를 보내어 평정하였다.

*** 무오(기원앞2283): 임금이 운사(雲師)에게 명하여 강화도 정족산에 삼랑성(郞城)을 쌓고 마 리산에는 하늘에 제사드리는 단을 쌓았다. 이것이 참성단(塹城壇)이다.

*** 신유(기원앞 2280): 3월에 임금이 친히 마리산 첨성단에 올라 하늘에 제사드리며 자손만대의 안녕과 번영을 빌었다. 우리 겨레는 하느님께 경배하는 풍습이  아득한 옛날로부터 널리 퍼져 있었 다. 백성들은 임금을 따라 집집이 천단을 만들고 새벽마다 경배하였다.

*** 갑술(기원앞 2267): 임금이 태자 부루(扶婁)를 도산(塗山)에서 순()임금이 보낸 우()와 만 나 치수법을 가르쳐주게 하였다. 도산으로 가는 도중 낭야성(琅耶城)에 반달 동안 머물며 낭야성 경내에 경당(扃堂)을 세워 젊은이들의 교육을 크게 일으키고 태산(태산)에서 삼신에 제사 지냈다. 이때부터 삼신의 옛풍습이 회사(淮泗: 지금의 산동성 사수현~강소성 회하 일대) 사이에서 크게 행 하여졌다.

태자가 도산에 도착하여 천하 모든 나라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회의를 주관하였다.

여기에서 물을 다스리지 못하여 큰 피해를 입은 우()에게 천부왕인(天符王인)을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을 몸에 지니면 능히 험한 곳을 지나가도 위태롭지 않으며 흉한 일을 만나도 해가 없을 것이 다. 또한 물의 깊고 얕음을 잴 수 있는 신침(神針)과 어떠한 험한 물도 진정 시킬 수 있는 황거종보 (倧寶), 이 세가지 보물을 너에게 주니 천제 아들의 큰 가르침을 어기지 않으면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우()는 삼육구배(三六九拜)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천제의 아드님의 명을 힘써 행 하여 우리 우()나라 순임금의 태평을 여는 정치를 도와 삼신에게 보답하면 기쁨이 지극하겠나이다 하고 태자 부루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았다. 이것이 오행치수의 중요한 비결이다. 

이어 태자는 이 회의에서 국경문제도 의논하였다.

 국경 분쟁이 생기게 된 것은, 순임금이 조선의 서쪽 땅에 유주(幽州), 영주(營州), 병주(幷州)를 설 치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조선이 안 된다고 하자 이 회담에서 유주와 영주가 우리 에게 속하게 되 었다. 또 회대에 제후를 두고 순임금에게 그곳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것이 도산회의(塗山會議)이다.                  

***경자(기원앞 2241): 도랑과 물 골을 깊이 파며 밭을 일구었다. 누에치기를 권하며 고기를 잡 고 사냥하는 일을 잘 다스렸다.

*** 상달에 백성들이 크게 모여 하늘에 제사하였다. 표정들이 다 밝게 빛났으며 즐거워 하였다. 임금의 덕이 세상에 멀리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 삼한은 모두 5() 65족속이었다. 이해(경자:기원앞 2241) 3 15일 임금이 세상을 떴다. 백성들은 모두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 하여 단군의 기를 세우고 아침 저녁으로 모여 앉아 경배하였다.

임금의 수는 130세였으며 태자 부루(扶婁)가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고동영의 단군조선 47대사의 기록 중 제1세 단군왕검 편을 옮겨온 내용이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중국의 고서들에는 단군조선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불과 2천년 전의 고주몽, 박혁거세, 온조마저 신화로 여기거나 아득한 원시시대의 일처럼 느끼면 서도, 같은 년대의 중국사나 서양사에 나오는 인물 및 사건들은 불과 수세기 앞의 일처럼 좀더 사 실감각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통감하며 이 역사적 상실감 앞 에서 더 이상 무력하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사명감을 불태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