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8)
<참역사문화 운동>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위서 (魏書)의 기록이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개국하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 칭하였다]라고 되어있는 반면 고구려 말에 쓰여진 고기(古記)의 기록은 [평양성에 도읍을 세우고 처음으로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칭하였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로 옮기었다… 도읍을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기었다. …그 후에 아사달로 환도하였다. 아사달에서 은퇴하였다]라고 된 경위에 대한 설명에서 첫째 만약 평양 성이 조선 최초의 도읍지를 뜻하는 지명이 었다면 끝부분의 그 후에 아사달로 환도하였고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서 은퇴하였다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에 평양성으로 다시 환도하였 고, 평양성에서 은퇴하였다고 기록 했어야 맞다는 것이다.
이는 고기의 저자가 단군조선 최초의 수도를 아사달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신라의 수도를 신라의 금성(金城)이라 하지 않고 신라의 서울(京)이라 하고, 백제의 수도를 백제의 사비성이라 하지 않고 백제의 서울이라 하듯이 아사달을 써 넣어야 할 자리에 무의식중 고구려의 수도인 평 양성을 써 넣었거나, 평양이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서 단군조선의 수도(서울)이라고 표기 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삼국사기 <잡지(雜誌)6>, <지리(地理)4>. 백제편의 기록 중에서 평양을 남평양(남서울), 서평양(서서울) 보통명사로 사용한 예를 들었고 이 내용은 고려사와 조선왕조 실록에도 수록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보다 더욱 확실한 근거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단군조선의 처음 도읍지가 어디인가를 위서(魏書)가 아닌 다른 곳에서 더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우선 중국의 가장 오래된 역사(지리)서인 산해경의 대황북경(大黃北經)의 기록을 다시 살펴 보면 서기전 4500여년 전에 동이 족의 치우가 군대를 일으켜서 황제 헌원을 정벌하였다. 이에 황제 헌원이 응룡의 군대로 하여금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남쪽의 기현(冀縣)을 중심으로 하남성 북 쪽, 산동성(山東城) 동북쪽, 산서성 남동쪽에 걸친 대평원에서 치우의 정벌군을 치게 하였다. …는 기록에서 보듯 치우천왕은 단군앞 국가 신시의 제 14대 환웅 자오지(자오지:기원앞 2706~2598)를 말한다.
이로부터 4대를 이어오던 신시는 18대 환웅 거불단이 82세로서 재위 48년만에 세상을 뜨시니 이로써 신시는 1565년을 이어오다 기원앞 2333년에 끝나고 웅씨(熊氏)의 비왕(裨王)으로 있던 거불단의 아들 왕검(王儉)이 구환(九桓)을 하나로 묶어 단군조선을 건국 하였다는 단군조선이 신시의 건국이념, 신시의 모든 제도를 계승하였다는 그 단군조선이 갑자기 이북의 평양성으로 도읍을 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이런 기록도 있다. 기원 앞 2311년에 도읍을 송화강(松花江)가로 옮기고 평양(平壤)이라 하였다. 이 또한 송화강가의 평양이라는 것이지 이북의 평양은 아니다.
그 밖의 토기나 지석층, 하늘에 제사지낸 제천단, 기원 앞 6200~5400년경의 흥륭와문화나 기원 앞 4710~2920년 경의 홍산문화, 그리고 기원 앞 2500~1700년 경의 하가점하층문화, 기원 앞 1600~700년 경의 하가점상층문화 등의 신시(神市) 및 단군조선의 문화유적과 홍산문화의 건축 법을 계승한 근, 현대 한국의 건축법 등을 총망라해 볼 때 위 평양성이 북한의 평양성이 아니며 아사달(阿斯達)이 단군조선 최초의 도읍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알아야 하겠다.
천손족(天孫族)의 제천단(祭天壇) 얘기는 훗날 따로 설명하겠지만 한가지 더 겯들이고자한다.
요녕성(遼寧省) 능원시(凌源市) 우하량(牛河梁)의 입량(立梁) 북쪽 언덕 정상에서 발굴된 신전 (神殿)은 그 주위 모두가 홍산문화의 묘지 유적군(遺跡群)으로 되어있는 곳으로서…발굴된 신전은 천손족 최초의 조상신인 천제(天帝)께 제사드린 제천의식을 거행하던 유적이 틀림 없다.
이러한 제천단 유적이 한반도에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마리산(摩利山) 정상부에도 있다. 이는 요하(遼河) 서쪽의 홍산문화(紅山文化 서기앞 4710~2920)의 주인공들과 한반도의 고대인들이 같은 천손족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임을 증명한다.
무릇 역사의 어떤 단서에 대한 연구에서 긍정적 자세로 조사하는 것과 부정하면서 조사, 연구하 는 것은 그 차이가 엄청나다.
어떤 이는 말한다, “역사 연구에서 가치중립이란 없다” 개인이 소속된 국가라는 것이 있는 이상 역사학자는 먼저 역사적인 사실 자체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는 일이 우선이지만 소속된 민족이 나 국가의 주관적인 가치를 적절히 우선적으로 투영하는 <아전인수 정신>을 가져야하는 이중성 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티끌만한 껀수가 있으면 지나(중국)는 고구려의 유물유적에 엄격한 통제를 가하고 사진 촬영도 금하면서 자기들에게 유리한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고, 일본은 그들의 고대사를 늘이기 위해 노골적으로 구석기 유물까지도 날조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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