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19)
<참역사문화 운동>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이제 단군조선의 개국과 최초의 수도 아사달에 대한 여러 근거들을 바탕으로 확인하는 일 을 마무리하면서 최태영 박사님의 논고를 간접 인용 하기로 하겠다.
[단군은 고조선을 개국한 우리의 실존 조상이라고 역사 첫머리에 찍어댄 것이 정인보이다. 우리 역사의 출발점을 정인보는 정확히 본 것이다. 본인(최태영)의 역사관도 이와 동일하다. 근세조선은 승유억불정책을 폈지만 나의 세대까지도 단군을 변함 없이 국조(국조)로 받들어 조선의 아이들이 <천자문> 다음으로 배우는 <동몽선습>에서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때 고 조선을 건국했다고 가르쳤다. 이는 의문의 여지가 없이 조선족 대대로 수천년 간 전해지던 시대상식이었다. 대한제국의 신식군대에서 군가로 부르던 “단기 내려 고강 산에 우리나라 새 롭다” 하는 노래를 내가 어렸을 적에 동요처럼 불렀다.
그런데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고조선이 환웅족, 곰토뎀족, 호랑이 토뎀족의 삼부족 연맹에 의해 성립된 개국과정을 설명하면서 매우 신화적 설명을 첨가하여 한 덩어리로 혼합해 뒤섞어 놓았다. 이것이 <위서>의 고조선 개국 기사보다 더 자세하고 긴 설명이어서 단군의 고조선 개국이 마치 신화인 것처럼 외양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 다고 해서 <위서>의 역사적 사실 기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중략) <삼국유사>보다 10여 년 뒤인 서기 1287년에 편찬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요동에 별천지가 있으니 중국과는 아주 구분되며, 삼면은 바다이고 북쪽은 대륙과 이어진 중방(中方) 천리 땅이 조선 이다. 천하의 명승이고 평화로운 고장, 예의바른 나라로서 중국인들이 다른 미개국과는 다른 문화국이라고 일컫는 나라이다. 시라(尸羅), 고례(高禮), 예와 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열국이 모이고 헤여지며 강성하고 쇠퇴하여 삼한이 이루어졌다. 주와 현이 산곡 간에 흩어져 각각 나라라 일컬으며 서로 침략하였다. 그 중의 대국은 부여와 비류국이었고, 다음은 삼국과 남북 옥저와 예맥이었다. 그들 왕의 조상은 모두 단군의 계통이었다”고 단군의 후예국들을 지적해 기록했다…….(중략) 역사기록과는 별도로 노래를 통해서도 단군의 개국과 그 역사가 구전돼 내려왔다.
단군의 개국과 역사의 구전 ‘세년가(世年歌)’
‘세년가(世年歌)’가 그것이다. 10월 수릿달이면 하늘과 조상에 제사하는 제천이 소도에서 행 해지고, 여기서 신지(臣智)라는 관명의 제관이 조상의 건국과 통치업적, 후인들에게 가르칠 일들을 노래로 전했다. 소도 제천의식은 대개 삼한시대 혹은 삼국시대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 인다. 기록에 의하면 삼한과 백제 등 여러나라에 각각 별읍이 있어 솟대를 세우고 제천을 행 했다. 내가(최태영) 자란 구월산 장련(長連)읍에도 ‘솟대백이’라는 넓은 벌이 있었다. 아사나루와 아사신당도 있었다. ‘솟대백이’라는 지명은 다른 여러 지방에도 있음이 확인 된다.
고조선의 수두교는 요(堯), 금(金) 등 중국 각지에 널리 분포됐다.
우리민족이 여러 차례 국난을 겪으면서도 단군 조상에게 제사하며 ‘세년가’를 불러온 사실은 <세종실록>과 유희령의 <표제음주 동국사략>에도 나와 있다.
심수관 등 조선의 도공들이 임진왜란 이후 가 있던 일본 가고시마의 미야마(美山)에서도 단군사당을 건축하고 일제 강점기까지 해마다 단군 제사를 받들며 ‘세년가’를 불렀음이 확인 됐다] 이례적으로 최태영 님은 1988년(단기 4321년)의 이병도의 글을 소개한다.
“우리나라에서 예부터 단군을 국조로로서 사당을 세우고 최고의 조상으로 받들어 왔는데, 그 것이 끊어진 것은 일제 강점 때부터였다. 지금까지도 여러 곳에 그 제단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 그 제사의 진설도와 세년가가 세전되어 오고 있다…(중략) 아무튼 실존 인간 단군과 영구 한 역사를 이어온 고조선에 관하여는 더 연구할지언정 신화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그에게 그의 모든 사서들을 새로 저술할 기회(시간)가 주어졌다면?
역사에서 가상은 금물, 상상은 상상일 뿐이다.
단군 이래 10월 상달의 소도행사,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신라. 고려 이래 의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국가적 대제전에 대한 설명을 뒤로 미룬채 제2세 단군 부루(扶婁) 왕검으로 넘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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