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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한국인

[세계의 한국인] 원산 버섯농장 원응식 박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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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1

RFA PHOTO/이현기

원응식박사가 버지니아 카틀렛에 있는 농장에서 버섯 성장을 관찰하고 있다.

워싱턴 인근에서 한 한인교포가 자신의 농장에서 생산한 ‘표고버섯’을 처음 선보여 미국 대륙 천지가
떠들썩한 일이 있었다. 바로 미 전역 언론들이 이 버섯작품을 경이로운 사실로 대서특필했기 때문이다.

1983년 당시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지 를 비롯한 미 유명 언론과 방송들은 그를 ‘아시아에서 온
위대한 개척자’라고 부르고 그와 버섯농장에 관한 일화를 크게 소개했다.

미국 언론이 수십 차례나 보도한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원주 출신이며 워싱턴 인근의 터전을 잡은
원응식씨이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 중심가에서 서쪽으로 한 시간여 거리 카트렛에
소재한 원산 버섯농장 원응식 박사의 버섯 세계 현장을 찾아가 본다.

원응식 씨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8년 원주에서 태어나 8형제 중 5번째인 그는 원주 중을 거쳐 원주
농고를 다니며 보통 시민으로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버섯 문익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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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농장에서 생산되고 있는 느타리 버섯 5개월 정도 성장한 상태로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다. - RFA PHOTO/이현기
원응식: 원주가 제 고향인데요. 거기서 태어났고 거기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버섯하고 인연 맺은 지가 47년 됐습니다. 올해 47년 됐지만 박사학위 받은지
한 6-7년 됐는데 오랫동안 하다 보니까 KNOWHOW가 쌓인 거예요. 그러다 미국에
보급해야 되겠다. 제가 오기 전에는 버섯이 미국에는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자칭
미국의 문익점이라고 합니다.

원응식씨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5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롭게 성장했다고 한다. 그 결과
초등학교 시절부터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고 강인한 삶에 도전하게 된다.

원: 굉장히 차갑게 커서요. 뭐 온종일 눈밭에 돌아다녀도 발이 시러니까 양말을 신어라,
2-3일을 굶어도 너 밥 먹었냐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어요. 굉장히 차갑게 커서요.
러다 보니까 야생마 식으로 강해지더라고요. 그래 초등학교 다닐 적 부터 누구한테
지는 걸 싫어해요. 왜 그러냐면 나는 어머니가 안 계시니까 너희가 깔보는구나! 이런
자격지심이라고 할까 이런 데서 오는 하나의 반발이지요. 그래서 계속 나는 이겨야 한다.
나는 이기고 강해야 된다는 식으로 생활하다 보니까. 개구쟁이로 살았어요.

원응식씨는 성균관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 대학원을 졸업하고 해군에 입대, 복무를 마친 후 서울에서
원산 고향에 가는 기차역에서 ‘무역만이 살길’이라는 방송을 듣게 된다. 이것이 오늘의 원응식씨가
버섯 박사가 된 동기이기도 하다.

원: 그때 당시 5.16혁명이 일어나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던 때인데 우리나라에 아무것도
없던 때였습니다. 산업도 그렇고 모든 것이 어려웠던 때인데 이제 우리가 일어서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식의 좋은 말씀이 나오더라고요.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해야 하고 우리는 무역을
해야 먹고 산다. 자원도 없고 이런 식의 방송이 나오는데 저에게 꼼꼼히 가슴에 와
닿더라고요. 나도 그 자리에 끼어들자고 생각을 했는데 저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제가 영어를 합니까 일어를 또는 중국어를 합니까. 한국말밖에 몰랐어요.
그러나 장사하는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 하면서 배우면 될 것 아니냐. 이래서----

원응식씨는 당시 한국 젊은이의 위상으로 무역업에 종사를 다짐하고 발 벋고 나선다.

원: 무턱대고 무역하겠다고 무역협회에 가서 문의했더니 서류를 내라는 등의 조건이
많더라고요. 그런 조건들을 어떻게 해 가지고 제일 첫 번에 출발한 곳이 홍콩입니다.
홍콩에 갔어도 누구를 붙들고 이야기합니까 말이 됩니까 뭐가 됩니까. 그때 참 난센스가
많았지요. 일화도 많고 그래도 용케도 좋은 사람을 만나서 무역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습니다.

원 씨의 오늘의 원산농장이 있기까지는 무역과 개척정신의 발로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는 홍콩을
거쳐 유럽 미국의 수출 시장까지 뛰면서 버섯과의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원: 그때 한국에서 제일 첫 번에 국외에 수출한 게 버섯하고 한약재입니다. 그걸 통틀어
1차 상품이라고 해요. 그때 당시 수출할 물량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홍콩시장 하나
가지고는 안돼요. 그래서 유럽에 나갔어요. 유럽시장도 짧더라고요. 그다음 누가 미국을
가보라고 해요. 미국에 오니까 시장이 엄청나게 커요. 뉴욕, 샌프란시스코, LA 시장 등을
조사하니까 상상외로 커요. 거기서 제가 힘을 얻었지요. 미국이 내 시장이 되겠다.
시장조사를 하면서 보니까. 미국에 수출해야겠다고 해서 제일 처음 중국사람들과 연결해서
뉴욕 차이나타운 같은 데서 거래를 했지요. 한 3년 동안 드나들면서 물건을 팔곤 했는데
그때가 한 1969년도 1970년도쯤 될 겁니다. 그랬는데 보니까 표고버섯 하면 한국에서
수출하는 게 전부 마른 것인데 이것으로 수출한다는 것도 못마땅하더라고요. 뭘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조사를 해보니까 신선한 버섯이 없어요. 생버섯이 그래 바로 이걸
찾으러 여기까지 왔구나 해서 버섯을 재배하려면 기후가 맞아야 하고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되니까. 미국에 와서 생산해야겠다.

원응식 씨는 직접 버섯을 재배키로 마음먹고 미국에서 자라는 참나무를 찾아 나선다. 원씨는 낡은
밴 트럭을 450달러에 사고 참나무를 찾아 동부 일원을 다니게 된다. 그리고는 실험 재배차 한국으로
가게 된다.

원: 제일 첫 번째 뉴욕에서 코네티컷으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다가 참나무가 있으면 차를
세워놓고 톱으로 잘랐어요. 큰일을 하려면 원칙만 따져 가지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무대보로 밀어 부쳐놓고 해결은 나중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었지요. 팔뚝만 한 길이에다
30센티 정도로 자르기 시작했는데 코네티컷 뉴욕 필라델피아 델라웨어 버지니아 오하이오
에코론 쪽으로, 남으로는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 등에서 참나무를 구하다
보니까 꽤 많아요. 이걸 뉴욕에 가서 큰 가방 3개를 사다가 집어 넣는데 3세를 집어넣고도
또 남아요. 그래 또 하나 사다가 4개 가방을 만들었는데 가방을 제가 들지를 못해요.
참나무니까. 이래서 이 걸을 비행장에 가지고 나갔는데 실어주지를 않아요. 그래서 뭐
한 이틀은 사정했어요. 통 사정을 했어요. 이걸 시험하는 건데 꼭 좀 실어 줘야겠다고 통
사정했더니 뭔 생각이 났는지 굉장히 비용이 비싸게 든다고 했는데 좋다고 했어요.
다 달라고 하는 대로 줬습니다.

원응식 씨가 비행기에 싣고 간 참나무가 세관통관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원: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김포공항에서 또 세관 검사에서 홍역을 치렀지요. 홍역을 치른
것이 무조건 안 된다는 거예요. 세관 직원이 정신이 잘못된 것 같다고 자기들끼리 이야기
했어요. 왜 명함을 보니까 무역회사 사장인데 당시의 무역회사 사장이다 하면 국외에
나가서요. 여자들 화장품 반지 같은 것 귀금속 이런 것 살려고 했지 이게 웬 미친 사람이니까
그렇지 그 큰 가방에다가 나무토막을 잔뜩 실어서 오는 미친 사람이 어디 있느냐 미친
사람 같다고. 이래서 서러움을 받았어요. 안 되겠다 생각이 들어서 그 당시 국무총리 하시던
분 5.16혁명 주체인데 그분이 무역협회장 하면서 굉장히 파워가 있었어요. 저를 굉장히
사랑해 주곤 했는데 이분에게 전화를 걸었지요. 내가 김포공항에서 미친 사람이 됐는데
이것 통관 좀 해야겠소 했더니 무슨 소리냐고 물어서 사정이야기를 쭉 했더니 펄펄 뛰어요.
당장 김포세관장 불러라 해서 자세하게 내용을 알더니 그게 아니잖아요. 야 이 사람들아
이게 내가 실험해서 성공하면 많은 달러를 벌 수 있는 거야 했더니 그래 공항직원들이
겸손하게 미안하다고 사람을 몰라봤다고 당시 공항에서 미친놈 취급을 받았지요.

원응식씨의 꿈은 서서히 이뤄지고 있었다. 그가 미국 참나무 원목에 실험한 버섯재배가 성공한
것이다. 당시 버섯이 나오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한다.

원: 임업시험장에 갖다 놓고 실험을 하는 거예요.균을 집어넣고 접종을 해서 전부 스티커
다 붙였죠. 이것은 버지니아산 오하이오 등의 이름을 붙이고 실험을 했는데 6개월 딱 됐는데
버섯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거기서 제가 엉엉 울었습니다. 그 슬픔 기쁨 전부 복잡한 거예요.
엉엉 울었어요. 내가 이제 떠날 때가 됐다. 이래 가지고선 미국에다 접목시켜야겠다.
그때 제일 첫 번 째 나온 버섯이 어디 원목이냐면 버지니아 산입니다. 그래서 제가
버지니아로 오게 된 겁니다. 그래서 버지니아에서 생산하게 된 거지요. 이것이 바로
미국에서 표고버섯의 시조입니다.

원응식 씨는 1980년대 들어 미국에서 표고버섯 재배가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버지니아 주 정부에
세금감면도 요청한 결과 허락되어 본격적인 미국산 표고버섯 재배가 이뤄진다.

원: 내가 미국에서 이 사업을 펼치는 데 성공할지 못할지는 50:50이다. 내가 보기에는
렇다.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면서 세금을 내면서 이 사업은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세금을 감면시켜다오. 앞으로 5-6년간만 감면시켜주면 주민들을 많이 고용해 쓰겠다
했는데 버지니아 주 정부에서 OK 했지요. 그래서 제가 세금이 없이 6-7년을 했습니다.
그때 자신만만했어요. 왜 자신만만했느냐. 인건비도 싸고 성공할 수 있다 해 가지고
시작을 했지요.

원 씨에게 큰 희망의 소식이 전해졌다. G-5 정상회의가 바로 버지니아 윌리엄스 버그에서
개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일본 다나카 총리를 위해서는 표고버섯
요리를 위해 백악관이 원응식 씨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후 미국언론에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원: 윌리엄스 버그에서 G-5 정상회담을 한다고 했어요. 그 당시는 G-5 하고 우리나라는
먼 이야기였어요. 당시 세계 최 강대국만 모이는 거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끼었고
그 당시 일본 총리가 다나카였습니다. 다나까 총리를 제가 알아요. 개인적으로 왜 아느냐
다나카 총리가 표고버섯 업자였습니다. 일본 총리와 중의원이 되기 전에 표고버섯
생산자였습니다. 그때 제가 두 번 만났어요. 일본에 가서 그런 친근한 관계도 있고
해서 깜짝 놀랐지요. 다나카가 온다. 백악관에선 각국 정상들이 온다면 정상들을 위한
식품을 따져요. 뭘 대접할 건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노르웨이 산 철갑상어 알
같은 것. 일본의 다나카 총리는 표고버섯이다. 이 표고버섯이 한국과 일본에서만 생산되는데
이걸 한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해야 될 것 아니냐. 그 회의를 주지사실에서 했습니다.
왜 G-5를 윌리엄스 버그에서 하니까. 버지니아 아니어요. 그래서 주지사 사무실에서
했어요. 그 회의를 하는데 주지사 사무실 비서가 듣고 나서 우리 버지니아에 표고버섯
생산하는 업자가 하나 생겼어. 여기 몇 번 왔다 갔는데. 전화번호 아느냐고 해서 안다고
이래서 연결이 된 거예요. 이게 연결되면서 뉴욕타임스에 흘러나갔고 CBS에 나갔고
미국 농무부에서 알게 되니까. 미국 언론을 타게 됐지요.

원응식씨는 처음 판매시장 때문에 힘들었지만, 미국 언론에 보도가 나간 이후 미국 전역에서
주문이 쇄도했다고 한다.

원: 처음에 버섯을 잘 만들었습니다. 3-4년 되니까 버섯이 많이 나오고 엄청나게 만들었는데
이것 참 기가 막히더라고요. 미국의 홍보 시스템을 잘 모르니까. 어떻게 홍보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G-5가 열리고 그게 대박이 나기 시작했지요. 뉴욕타임스의 원본도 가지고
있습니다만 뉴욕타임스에서 전면 인터뷰를 했잖아요. 그러고 이제 농무부에서 인터뷰하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매스컴에 뜨니까 미 전국에서 주문이 들어오는 거예요. 있는 대로 다
달라는 업자도 있고 어떤 업자는 그 당시 10만 달러면 매우 컸습니다. 10만 달러를 은행에
갖다놔요. 나 돈 10만 달러 갖다 놓았으니까 생산되는 데로 다 갔다 달라는 등 판매가
해결되더라고요.

원응식씨는 G-5 정상회의에 사용하기 위해 백악관에서 헬리콥터로 표고버섯을 운송해 갔다고 당시를
얘기한다.

원: 무슨 훈련을 하는 줄 알았어요. 농장 상공에 헬리콥터 2대가 떴어요. 그래서 상공에서
전화가 오는 거예요. 곧 내린다.내린다. 그래 비서를 시켜 '가라고 그래' '내리지 말라고
야단을 쳤단 말이야. 그랬더니 비서도 미국사람인데 어리둥절 한거요. 헬리콥터 타고 온다고
했으면 내가 알았지 자동차 타고 오는 줄 알았지 누가 헬리콥터 타고 오는 줄 알았어.
그랬더니 미스터 원을 바꾸라는 것 같고 그럼 너희들은 누구냐. 그랬더니 어제 우리가
10시에 온다고 했는데 못내리게 하느냐고 오 그랬구나 그러면 내려오라고 그래 마침
마당은 넓었어요. 그래 두 대가 내렸어요. 백악관 휘장 있는 것 두 대가 내렸는데 보니까
한 7명인가 내렸어요. 그런데 전부 기자들이야. 기자들이고 그리고 백악관 주방장이라는
사람 백악관의 주방장이면 차관급입니다.

당시 원응식씨와 이야기 하는 중에 이미 뉴욕타임스 기자는 기사를 송고하고 있었다고 설명해 준다.

원: 저는 인터뷰 하는지도 몰랐어요. 제 사무실이 넓었는데 제의자 뒤에 대형 태극기가
걸려져 있었고 제 앞쪽으로 앉아 이야기를 하는데 덕담하는구나 하고서는 질문 하는대로
대답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저 구석에 않은 사람이 머리가 하나도 없던
사람인데 손을 떠는 듯 보였어요. 저 친구는 풍기가 있는것 같아 그냥 가만 나 두었어.
이 사람을 알고 봤더니 뉴욕타임스의 편집부장이었어요. 이 사람이 계속 기사를 송고한
거야. 아유 깜짝 놀랐어요. 그랬더니 이틀 만에 뉴욕타임스에 보도 됐는데 ‘아시아에서
온 개척자다 뭐다’ 해서 나오기 시작하니까 TV방송에서 보도하지, 워싱턴 포스트에서
취재하다 보니까 이렇게 유명세를 타더라고요.

한국인 원응식씨는 표고버섯 500파운드 값으로 백악관 체크 7,500달러를 받았지만, 6.25 전쟁
중에 미국이 한국을 도운 만큼 나도 너희를 돕겠다며 백악관 체크를 돌려줬다고 한다.

원: 그때 당시 거기 왔던 사람이 버섯이 얼마나 있느냐. 얼마 있다. 얼마나 필요하냐 묻더니
한 500파운드 필요하데 매니저 불러서 500파운드 포장해서 실어줘 했더니 직원들이 신속하게
실어 줬어요. 그때 파운드 당 15달러 받았다고 500파운드면 7,500달러예요. 7,500달러
백악관 체크로 주더라고요. 난 처음 봤어요. 뒤에다 이서해서 그대로 줬지 그리고 가지고
가라고 왜 그러냐고 너희도 우리나라를 위해 피를 얼마나 많이 흘렸는데 내가 이걸 하나
주면 안될게 무어있냐. 그리고 다음의 농담이지만 G-6때는 우리나라 대통령도 끼워다오
그랬더니 자기들도 배꼽을 빼고 웃더라고요. 껄껄 웃더라고 참 고맙다고 하고 가져가고
그 다음에 백악관에서 고맙다고 옷도 오고 뭣도 왔었는데 어디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원응식씨는 미국 농무부과 여러 대학 등과 버섯과 관련해 연구하면서 버섯 박사학위까지 받게 됐다고
설명해준다.

원: 네 지금도 하고 있어요. 지금도 하고 있고 농무부하고 인연을 맺은 것은 스나이더 차관
되시는 분이 영국에서 세계 식품 박람회가 있었어요. 그랬을 적에 농무부에서 우리도
미국의 식품을 하나 좀 좋은 걸 홍보하고 내 보내자 이래 가지고 스나이더가 생각한 것이
리 버섯을 가지고 출품하면 어떻나 이래서 농장에 와서 인터뷰하고 사진도 찍고 해서
멋지게 만들었어요. 이 액자를 많이 만들어서 영국 식품박람회에 가서 전시했데요. 우리가
사는 버지니아에는 담배하고 표고버섯이 명품이다. 그 이후 난데없이 영국에서 주문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런던에 한 1년 정도 수출을 했지요. 수출을 해주고 이러다 보니까
농무부하고 관계가 깊고 세월이 가다 보니까 어떤 계기가 나오느냐면 각 대학에서 자꾸만
연락이 와요. 연락이 오는 것이 그것이 박사학위를 생각하게 된 계기인데 왜 연락이 오느냐.
우리는 표고버섯에 대한 아무런 재료가 없다. 그러니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네가 아는 것을
줘야겠다. 그래서 제가 글을 쓰기 시작했지요. 글을 쓰기 시작해서 각 대학에서 이야기하면
보내주고 보내주곤 했어요. 그랬더니 몇 개 대학에서 자꾸만 학위문제가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논문을 쓰기 시작했고 이래서 박사라고 하는 것까지 가게 됐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미국에 표고버섯을 들여와 미국 농업계의 개척자로 알려진
원응식 박사의 버섯 세계 현장을 함께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원응식씨가 버섯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투혼의 노력과 지금도 끊임없는 곰팡이 연구에 돌입하는 그의 버섯 세계를 찾아갑니다. 세계의 한국인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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