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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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5
미국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유명 가전제품 회사에서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하던 60대 한인이 젊은 시절 품었던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앨범들을 잇달아 발표해 화제가 되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디트로이트 재미동포 차진영 박사의 삶의 열정 2부, ‘미국에서 공학박사와 가수의 꿈을 이루다.’를 함께한다.
연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차진영 씨는 미국으로 유학, 매사추세츠주 우스터 공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미시시피주립대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펜실베이니아대 조교수를 역임한 뒤, 필립스 USA에서 16년간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등 '성공한 유학파 공학도'이자 ‘가수의 꿈’을 실현했다.
어린 시절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듣는 순간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마음속에 새겼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공학도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차진영 씨는 공학도의 어려운 길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싶은 열정을 숨길 수 없었단다. 차진영 씨는 매사추세츠주 우스터 공대에서 석사과정 공부에 쫓기면서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쇼를 보려고 표를 구하려던 이야기는 노래에 대한 그의 열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의 유학시절, 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나는 꿈이 좌절된 얘기를 들어보자!
차진영: 저는 1972년도 대한민국 정부에서 실시하는 정규 유학 시험에 합격해 미국 유학을 오게 됐습니다. 유학을 떠나는 저에게 박사 학위를 받고 금의환향 하라는 친구의 말에, 저의 대답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나러 간다고 했지요. 내가 미국 유학 하던 1975년에 엘비스 프레슬리 공연이 보스턴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보스턴 근교인 매사추세츠주 우스터 공대에서 석사 학위 공부를 하던 나는 공부에 쫓김에도 엘비스 쇼를 보려고 표를 사려고 했더니, 이미 6 개월 전에 표가 다 팔렸다는 거에요. 그래서 엘비스의 향수를 느끼려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인 미시시피 공대에 박사 학위를 신청했는데 운좋게 장학금을 받게 돼 1976년도에 “미시시피 주립대”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엘비스 프레슬리는 그다음 해인 1977년도에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진짜 유학 목적이었던 엘비스를 만나는 꿈이 좌절된 것입니다.
차진영 씨의 유학시절, 김치가 먹고 싶었던 일은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힘든 박사 학위 과정을 끈질긴 의지로 도전하면서도 엘비스 노래를 부르는 일은 계속했다.
차진영: 1973년 우스더 공대 대학원 시절입니다. 우스더에는 한국 식품점이 없었습니다. 그래 한국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김치가 먹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가장 원하는 것이 김치국물이라도 좋으니 한 모금만 마셨으면 하는 것이 소원 이었습니다. 공부에 쫓겨 1시간도 낼 수 없는 지경인 데 김치를 먹기 위해 보스턴까지 갈 수 없어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 학기가 끝나고 차도 없어 버스로 보스톤 대학 음대 석사 학위를 받으시고, 보스턴에서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시던 차진선 누나에게로 가게 됐습니다. 누나 집에 가자마자 냉장고를 열어 김치를 입에 넣었습니다. 정말 눈물이 쭉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김치를 먹는 것과 엘비스 노래를 부르는 일은 공부와 함께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차진영 박사는 유학시절은 아름다운 추억보다는 아주 힘들었던 기억이 더 많단다.
차진영: 그 당시 공부 이야기를 하자면 강의 시간에 들어가면 교수님의 말이 소리만 들리지 교수님의 강의가 하나도 안 들려 강의를 듣는 게 아니고, 불안에 떨다가 나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하다 보니 박사 학위도 미국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유학시절은 아름다운 추억을 가졌기보다 아주 힘들었고, 다시 태어난다면 유학의 길을 떠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차진영 박사는 공학박사로서 35개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공학도들의 세계 학술 대회 때는 공동 의장직으로 이바지를 하기도 했다.
차진영: 한국에서 연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유학해 워체스터 폴리 테크 인스티튜트(Worcester Polytechnic Institute) (WPI) 미시시피 주립대에서 기계공학 석사, 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고, 펜실바니아 주립대 조교수를 역임했으며 필립스사 USA에서 16년간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다 은퇴했습니다. 35 학계 논문을 발표하고, 2개의 특허를 냈으며,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서 열렸던 Boundary Element Method 세계 학술 대회 때 공동 의장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차진영 박사는 한인사회 봉사에도 큰 몫을 한다. 디트로이트 한인회장 시절 미국과 한국 간 경제협약의 큰 다리를 놓아준 장 본인이다. 이 경제협약으로 한국의 많은 자동차 부품 회사들이 디트로이트에 설립돼 한국과 미국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현재도 미국 중서부 한인회연합회 요직을 맡고 있다.
차진영: 2001년 디트로이트 한인회장 시절인데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노력해, 미시간주에서는 최초로 미국과 한국의 경기도와 경제 협약을 성사시키도록 한 바 있습니다. 이 협약으로 한국의 많은 자동차 부품 회사들이 디트로이트에 설립돼 한국과 미국의 경제 발전에 크나큰 기여 한 바 있으며, 현재도 기여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몇 개 안 되는 문화회관인 미시간 문화회관도 2001년 디트로이트 한인회장 시절 건립되었습니다. 이 공헌으로 미시간주 Speaker of House 인 Rick Johnson 으로 부터 “Special Tribute Award” 을 받은 바 있습니다. 지금은 일리로이드주, 미시간주, 오하이오주 등 미 중서부의 13개 주의 현, 전직 한인회장으로 이루어진 "미 중서부한인회연합회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차진영 씨는 한국과 미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명사로 이름을 올렸다. 바로 세계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세계 인명사전에 오르는 영예를 차지했다.
차진영: 세계의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으로 선정돼, 유명한 세계 인명사전 ( 2011 Universal Who’s Who) 에 올랐으며 이 잭은 2011년 8월에 출간됩니다. 이전에도 ( 세계 인명사전 2009 Presidential Who's Who Directory : Yahoo 회사에서 경영) 와 세계 인명사전 2001 Strathmore's Who's Who Directory 에 오른 바 있습니다.
미국의 가장 큰 자동차 회사가 있는 도시, 차진영 박사가 사는 디트로이트를 자랑해 달라고 했다.
차진영: 디트로이트는 Motor City 이라고 불리며 자동차 업계가 성황이었던 1960년대에는 미국 제2 의 도시로 군림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잘 반영하여 1960년대의 “ Detroit City “라는 POP Song 이 히트하여 그 당시에 한국에 살던 사람이면 다 알던 추억의 곡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가장 큰 3개의 자동차 회사 지엠, 포드와 크라이슬러가 있습니다.
차진영 박사는 가수로 노래해 돈을 벌거나 명예를 높이겠다는 욕심은 없으며, 그저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어느 곳이건 달려가 청중들을 기쁘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틈나는 대로 공연 장비를 정비하며 1~2시간짜리 공연 시나리오도 짜놓았다는 차씨는 "미국 사람들이 '진 차'라고 부르는데, 이제 '진짜' 가수가 되고 싶다."며 "자신과 함께하며 행복해지는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노래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계 한인들과 함께하고 싶은 이야기도 들려준다.
차진영: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가 돼 세계의 한인들과 내 음악을 나누고 싶고, 더 나아가서는 나의 인생철학이 담긴 나의 작사 작곡인 내 자신이 되고파, 우측 좌측 뒤를 보아라, 내행복 여기에, 사랑해 너만을 과 보실이 보실이 등을 널리 알려 음악은 물론 나의 인생철학까지도 세계의 한국인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차진영 박사는 자신을 "엘비스 차라 불러달란다. 또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며 꿈을 키워왔고, 항상 마음속에 담아 이제 은퇴해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었던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라며 자신을 불러주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고 의지를 불태운다. 차 박사 가수의 길은 몇 년 전 공식 가수로서 앨범을 출시하면서 시작되었고, 이제 명함도 제작하고 홈페이지(www.chinchamusic.com) ‘차진영 노래 사랑회’와 자신을 홍보하는 배지까지 만들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는 자신의 영웅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엘비스 프레슬리라며 서슴없이 말한다. 이미 디트로이트에서 그는 엘비스 차로 통한다. 심지어 엘비스프레슬리 축제에도 참가해 몇 안 되는 동양인으로 미국 관객들 앞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열창하기도 한다.
미 전역을 상대로 가수활동에 나서겠다며 한인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에는 무료로 노래봉사를 아끼지 않겠다는 차진영 씨, "노래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노래를 듣고 관객들이 기분 좋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하다"고 말한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디트로이트 재미동포 차진영 박사의 삶의 열정 2부, ‘미국에서 공학박사와 가수의 꿈을 이루다.’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디트로이트 재미동포 차진영 박사의 삶의 열정 2부, ‘미국에서 공학박사와 가수의 꿈을 이루다.’를 함께한다.
연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차진영 씨는 미국으로 유학, 매사추세츠주 우스터 공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미시시피주립대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펜실베이니아대 조교수를 역임한 뒤, 필립스 USA에서 16년간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등 '성공한 유학파 공학도'이자 ‘가수의 꿈’을 실현했다.
어린 시절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듣는 순간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마음속에 새겼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공학도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차진영 씨는 공학도의 어려운 길 속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싶은 열정을 숨길 수 없었단다. 차진영 씨는 매사추세츠주 우스터 공대에서 석사과정 공부에 쫓기면서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쇼를 보려고 표를 구하려던 이야기는 노래에 대한 그의 열정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의 유학시절, 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나는 꿈이 좌절된 얘기를 들어보자!
차진영: 저는 1972년도 대한민국 정부에서 실시하는 정규 유학 시험에 합격해 미국 유학을 오게 됐습니다. 유학을 떠나는 저에게 박사 학위를 받고 금의환향 하라는 친구의 말에, 저의 대답은 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나러 간다고 했지요. 내가 미국 유학 하던 1975년에 엘비스 프레슬리 공연이 보스턴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보스턴 근교인 매사추세츠주 우스터 공대에서 석사 학위 공부를 하던 나는 공부에 쫓김에도 엘비스 쇼를 보려고 표를 사려고 했더니, 이미 6 개월 전에 표가 다 팔렸다는 거에요. 그래서 엘비스의 향수를 느끼려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인 미시시피 공대에 박사 학위를 신청했는데 운좋게 장학금을 받게 돼 1976년도에 “미시시피 주립대”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엘비스 프레슬리는 그다음 해인 1977년도에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진짜 유학 목적이었던 엘비스를 만나는 꿈이 좌절된 것입니다.
차진영 씨의 유학시절, 김치가 먹고 싶었던 일은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힘든 박사 학위 과정을 끈질긴 의지로 도전하면서도 엘비스 노래를 부르는 일은 계속했다.
차진영: 1973년 우스더 공대 대학원 시절입니다. 우스더에는 한국 식품점이 없었습니다. 그래 한국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김치가 먹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가장 원하는 것이 김치국물이라도 좋으니 한 모금만 마셨으면 하는 것이 소원 이었습니다. 공부에 쫓겨 1시간도 낼 수 없는 지경인 데 김치를 먹기 위해 보스턴까지 갈 수 없어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 학기가 끝나고 차도 없어 버스로 보스톤 대학 음대 석사 학위를 받으시고, 보스턴에서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시던 차진선 누나에게로 가게 됐습니다. 누나 집에 가자마자 냉장고를 열어 김치를 입에 넣었습니다. 정말 눈물이 쭉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김치를 먹는 것과 엘비스 노래를 부르는 일은 공부와 함께 중요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차진영 박사는 유학시절은 아름다운 추억보다는 아주 힘들었던 기억이 더 많단다.
차진영: 그 당시 공부 이야기를 하자면 강의 시간에 들어가면 교수님의 말이 소리만 들리지 교수님의 강의가 하나도 안 들려 강의를 듣는 게 아니고, 불안에 떨다가 나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하다 보니 박사 학위도 미국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유학시절은 아름다운 추억을 가졌기보다 아주 힘들었고, 다시 태어난다면 유학의 길을 떠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차진영 박사는 공학박사로서 35개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공학도들의 세계 학술 대회 때는 공동 의장직으로 이바지를 하기도 했다.
차진영: 한국에서 연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유학해 워체스터 폴리 테크 인스티튜트(Worcester Polytechnic Institute) (WPI) 미시시피 주립대에서 기계공학 석사, 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고, 펜실바니아 주립대 조교수를 역임했으며 필립스사 USA에서 16년간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다 은퇴했습니다. 35 학계 논문을 발표하고, 2개의 특허를 냈으며, 영국의 명문 옥스퍼드 대학에서 열렸던 Boundary Element Method 세계 학술 대회 때 공동 의장직을 맡기도 했습니다.
차진영 박사는 한인사회 봉사에도 큰 몫을 한다. 디트로이트 한인회장 시절 미국과 한국 간 경제협약의 큰 다리를 놓아준 장 본인이다. 이 경제협약으로 한국의 많은 자동차 부품 회사들이 디트로이트에 설립돼 한국과 미국경제에도 크게 이바지한 것이다. 현재도 미국 중서부 한인회연합회 요직을 맡고 있다.
차진영: 2001년 디트로이트 한인회장 시절인데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노력해, 미시간주에서는 최초로 미국과 한국의 경기도와 경제 협약을 성사시키도록 한 바 있습니다. 이 협약으로 한국의 많은 자동차 부품 회사들이 디트로이트에 설립돼 한국과 미국의 경제 발전에 크나큰 기여 한 바 있으며, 현재도 기여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몇 개 안 되는 문화회관인 미시간 문화회관도 2001년 디트로이트 한인회장 시절 건립되었습니다. 이 공헌으로 미시간주 Speaker of House 인 Rick Johnson 으로 부터 “Special Tribute Award” 을 받은 바 있습니다. 지금은 일리로이드주, 미시간주, 오하이오주 등 미 중서부의 13개 주의 현, 전직 한인회장으로 이루어진 "미 중서부한인회연합회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차진영 씨는 한국과 미국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명사로 이름을 올렸다. 바로 세계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세계 인명사전에 오르는 영예를 차지했다.
차진영: 세계의 발전에 이바지한 사람으로 선정돼, 유명한 세계 인명사전 ( 2011 Universal Who’s Who) 에 올랐으며 이 잭은 2011년 8월에 출간됩니다. 이전에도 ( 세계 인명사전 2009 Presidential Who's Who Directory : Yahoo 회사에서 경영) 와 세계 인명사전 2001 Strathmore's Who's Who Directory 에 오른 바 있습니다.
미국의 가장 큰 자동차 회사가 있는 도시, 차진영 박사가 사는 디트로이트를 자랑해 달라고 했다.
차진영: 디트로이트는 Motor City 이라고 불리며 자동차 업계가 성황이었던 1960년대에는 미국 제2 의 도시로 군림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잘 반영하여 1960년대의 “ Detroit City “라는 POP Song 이 히트하여 그 당시에 한국에 살던 사람이면 다 알던 추억의 곡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가장 큰 3개의 자동차 회사 지엠, 포드와 크라이슬러가 있습니다.
차진영 박사는 가수로 노래해 돈을 벌거나 명예를 높이겠다는 욕심은 없으며, 그저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어느 곳이건 달려가 청중들을 기쁘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틈나는 대로 공연 장비를 정비하며 1~2시간짜리 공연 시나리오도 짜놓았다는 차씨는 "미국 사람들이 '진 차'라고 부르는데, 이제 '진짜' 가수가 되고 싶다."며 "자신과 함께하며 행복해지는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노래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계 한인들과 함께하고 싶은 이야기도 들려준다.
차진영: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가 돼 세계의 한인들과 내 음악을 나누고 싶고, 더 나아가서는 나의 인생철학이 담긴 나의 작사 작곡인 내 자신이 되고파, 우측 좌측 뒤를 보아라, 내행복 여기에, 사랑해 너만을 과 보실이 보실이 등을 널리 알려 음악은 물론 나의 인생철학까지도 세계의 한국인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차진영 박사는 자신을 "엘비스 차라 불러달란다. 또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며 꿈을 키워왔고, 항상 마음속에 담아 이제 은퇴해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었던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라며 자신을 불러주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고 의지를 불태운다. 차 박사 가수의 길은 몇 년 전 공식 가수로서 앨범을 출시하면서 시작되었고, 이제 명함도 제작하고 홈페이지(www.chinchamusic.com) ‘차진영 노래 사랑회’와 자신을 홍보하는 배지까지 만들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는 자신의 영웅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엘비스 프레슬리라며 서슴없이 말한다. 이미 디트로이트에서 그는 엘비스 차로 통한다. 심지어 엘비스프레슬리 축제에도 참가해 몇 안 되는 동양인으로 미국 관객들 앞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열창하기도 한다.
미 전역을 상대로 가수활동에 나서겠다며 한인 노인들을 위한 경로잔치에는 무료로 노래봉사를 아끼지 않겠다는 차진영 씨, "노래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노래를 듣고 관객들이 기분 좋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하다"고 말한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디트로이트 재미동포 차진영 박사의 삶의 열정 2부, ‘미국에서 공학박사와 가수의 꿈을 이루다.’를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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