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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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5
한국의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을 거쳐 미국 위스콘신대학원에서 금속공예를 공부한 재미동포 정은미 씨는 2011년 11월 초에 11번째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버지니아 맥클린에 있는 MK 캘러리에서 가진 개인전에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스팩트럼’을 주재로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지고 관찰되는 마음조각들을 색으로 표현한 주얼리, 즉 장신구 30여 점을 선보여 금속공예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정 씨는 지난 1996년 스미소니언 공예대전에서 대상과 94년 워싱턴 그래프트 엑스포 컬렉터스 어워드 등을 수상했으며 150여 회의 그룹 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 일원에서 활발한 금속공예가로 활동하는 정은미 씨의 작품세계를 찾아가본다.
금속공예가 정은미 씨에게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물어봤다. 정 씨는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만드는 걸 즐겼다고 들려준다.
정은미: 금속이라는 자체가 사실은 굉장히 딱딱하게 들리고 쇠 같은 느낌이 나니까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냥 작가로서 미술의 창작활동을 하면서 재료를 금속을 주재료로 사용했다는 것이지, 사실은 금속만 가지고 작업하는 게 금속공예는 아니거든요. 공예 중에서 일부분이에요. 그런데 금속 공예를 하다 보면 나무도 쓸 수 있고 천도 같이 쓰면서 주재료가 금속이 되는데, 제 경우는 어린 시절에 만들기를 좋아했어요. 인형놀이를 한다든지 밖에서 아이들과 진흙 놀이를 할 때도 굉장히 잘 만들었고, 작업을 일단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요 .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밤을 새우면서 작업하다 보면 날이 밝도록 몰두해 작업하던 것이 어렸을 때부터 천성이었던 것 같아요.
정은미 씨에게 한국에서의 학창시절의 이야기도 들어본다.
정은미: 저는 유신정권, 박정희 대통령 암살당하던 시대에 대학을 다녔어요. 그래서 홍대를 다니면서 학교가 거의 문을 닫은 적이 많아요. 데모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학교에서 수업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로 밖에서 교수님과 학생들이 만나서 수업하던 날들이 많았던 특이한 학창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공방을 만들어서 공부하기도 했고 작품을 만들어 팔기도 하는 등 특이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기억하는데 제 개인적인 학창시절은 정직하고 착한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대학교 시절이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학교에서 배운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을 해서 저희 동기들이 10여 명 됐나! 거의 다 대학원을 들어간 셈이었어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더 공부하고 싶어서인지 동기 중 네 명이 미국으로 유학까지 오게 됐어요.
정은미 씨로부터 금속공예의 다양성을 들어보자!
정은미: 금속공예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주얼리(보석 디자인), 장신구 등이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기, 예를 들어서 은쟁반, 은 공기, 은수저. 은 젓가락, 설탕과 프림 그릇 등 이런 것들을 금속공예가들이 많이 만들고, 요즘에는 금속 조각을 실생활에 연결해서 거울 프레임, 액자 이런 것을 금속으로 만들기도 하고 또 책상도 만들고, 그래서 금속 공예에 대한 영역은 참 넓다고 생각해요. 실생활에 많이 응용될 수가 있는데 예를 들어 나무로 책상을 만든 다음에 금속으로 데코레인션을 만들기도 하고 다양하게 이용되는 게 금속공예인 것 같아요.
정 씨가 미국 위스콘신대학원에서 공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정은미: 80년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오게 됐는데 저희 동기가 금속공예가로서 미국 유학 온 첫 번째 세대라고 볼 수 있어요. 한국에서는 주로 기법(테크닉)에 주력해서 교육을 받았는데 위스콘신 대학원에 에서는 미국 교수님들이 금속 공예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을 각자가 선택해서 수업을 들으면서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쪽으로 인도하시더라고요. 기술적인 면은 작품을 하는 데 있어서의 어떤 도구일 뿐이지, 기술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면서 다른 분여와 다른 재료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결국은 모든 지식이 합해져서 나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어요. 미국에서의 대학원 공부는 각자 시간 될 때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교 작업실에서 작업에 몰두해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고 지금까지의 삶에서 그때처럼 열심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작업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정 씨는 위스콘신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강인함으로 성장하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정은미: 미국 교육은 Concept & Critic(개념과 평론)이 주로 이어지는 것이란 것을 배웠어요. 작품 기법은 학생이 각자 여러 과목을 택해서 배워나가는 것이고, 학교에서 교수님께서 리드하는 것은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동기와 생각, 작가로서 발전되어가는 그런 과정을 지도합니다.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자기 작품에 대해 평가를 해요. 비평이 끝나고 나면 학생들이 다 울어요. 많이 깨지기 때문이에요. 첫 학기 때는 영어도 잘하지 못하는데다 너무 기가 막히고 무섭고 슬퍼서 다른 학생들로부터 질문을 받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끝까지 답변은 했지만 끝나고 나서는 저도 많이 울었지요. 그러면서 차츰차츰 작가로서의 확신과 자신감이 생겨나면서 나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강인함을 배워나가게 되었지요.
정 씨는 11회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개인전은 언제인가 물어봤다.
정은미: 미국에서 작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주로 미국(베러리 힐즈, 시카고 등)에서 개인전을 많이 했고, 외국에서도 여러 번 했지요. 1996년에 제가 워싱턴 금속공예가 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북미 금속공예가 협회 컨퍼런스를 워싱턴에서 개최한 일이 있었어요. 이때 세계 금속 공예가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제 작품이 소개되면서 스코틀랜드에서도 초대를 받아 전시했는데, 전시를 위해 갔다가 스코틀랜드를 기차로 한 바퀴 돌아볼 기회를 가졌었는데 혼자서 하는 여행은 조금은 겁은 나지만 참 인상이 깊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일본에서의 초대개인전도 인상이 남는데 전시를 끝내고 하꼬네 온천여행도 해 보았지요. 이렇듯 개인전은 로컬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여러 나라를 여행할 기회가 많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개인전과 함께 여행했던 추억들이 기억에 남아요.
정 씨에게 각종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도 들어본다.
정은미: 제가 열심히 활동할 때 100명을 뽑는데 천 명 이상이 공모해서 선발되는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공예 대전에 제가 90년대부터 7-8년 동안 매년 뽑혀서 전시하고 작품도 팔고 저를 소개하는 쇼를 했는데 그때만 해도 한국 분 작가들이 없을 때였어요. 그래서 한국인으로는 제가 첫 번째라고 볼 수 있어요. 지금은 한국 분들이 많이 미국에 와서 이런 쇼도 하지만 그때 저의 작품 주제가 특별한 게 있고 운도 좋았고 대상을 차지해서 기뻤던 적도 있고, 그렇게 되면 상금도 받아 좋았고, 컬렉터들 즉 수집가들이 뽑는 어워드(상)에도 수상이 됐었고, 여러 지역에서 하는 쇼에서도 수상했으며 그러나 다른 작가에 비해 수상 경력이 많다고는 볼 수 없어요. 제가 공모를 많이 한 편이 아니고 조용히 작업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그렇지마는 몇 가지 수상경력은 인상에 남아요.
이번 개인전에는 어떤 작품을 전시했는지 물어봤다.
정은미: 이번에 전시한 작품은 대부분 장신구예요. 저는 장신구뿐만 아니라 페인팅도 하고 사진도 하고 3D컴퓨터 작업도 하는 멀티미디어 작가예요. 장신구는 저의 전공인데다가 오랫동안 해 왔던 거기 때문에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고, 이번 전시는 MK 갤러리가 장신구 화랑이기 때문에 목걸이 9점, 브로치 16점, 그리고 귀걸이, 페인팅 등 30여 점을 전시했고, 그리고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색깔로 보는 마음의 교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재 몽고 메리 대학에 강사로 나가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정은미: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 학생들한테 배울 점이 많더라고요. 제가 가르친다고 하지만 학생들과 대화나 학생들 작품을 보고 이 작품이 어떻게 나왔을까 이야기하면서 학생들 지도에 보람도 느끼면서 제가 굉장히 마음이 넓은 사람이 돼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학교에 나간다는 것은 보람되는 일이고 또 저를 통해서 학생들이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즐거워하고 전공하고 싶어하는 것을 보면 참 가르친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구나! 힘든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고, 어떤 때 우울한 날 있잖아요. 그런 날도 학생들과 함께하면 우울한 게 다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강사로 학교에 나가는 것을 즐거워하고 보람 있게 생각하고 있어요.
정은미 씨는 남북통일 되면 북한에서 금속 공예를 소개하고 싶단다.
정은미: 물론이지요. 북한에서도 여러 가지 공예 작업이 이뤄지고 있고, 종이 잘라서 예쁜 모양도 만드는 것을 봤거든요. 그러나 아직은 교육 제도라는 것이 서구 교육제도와 같이 어우러져서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마 금속공예가 생소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기회가 되어 북한에 가서 가르치게 된다면 그것만큼 영광이 없을 거고 또 같은 민족이니까 아마 좋은 성과가 있겠죠.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 일원에서 활발한 금속공예가로 활동하는 정은미 씨의 작품세계를 찾아가봤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 일원에서 활발한 금속공예가로 활동하는 정은미 씨의 작품세계를 찾아가본다.
금속공예가 정은미 씨에게 어린 시절은 어땠는지 물어봤다. 정 씨는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만드는 걸 즐겼다고 들려준다.
정은미: 금속이라는 자체가 사실은 굉장히 딱딱하게 들리고 쇠 같은 느낌이 나니까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냥 작가로서 미술의 창작활동을 하면서 재료를 금속을 주재료로 사용했다는 것이지, 사실은 금속만 가지고 작업하는 게 금속공예는 아니거든요. 공예 중에서 일부분이에요. 그런데 금속 공예를 하다 보면 나무도 쓸 수 있고 천도 같이 쓰면서 주재료가 금속이 되는데, 제 경우는 어린 시절에 만들기를 좋아했어요. 인형놀이를 한다든지 밖에서 아이들과 진흙 놀이를 할 때도 굉장히 잘 만들었고, 작업을 일단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어요 .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밤을 새우면서 작업하다 보면 날이 밝도록 몰두해 작업하던 것이 어렸을 때부터 천성이었던 것 같아요.
정은미 씨에게 한국에서의 학창시절의 이야기도 들어본다.
정은미: 저는 유신정권, 박정희 대통령 암살당하던 시대에 대학을 다녔어요. 그래서 홍대를 다니면서 학교가 거의 문을 닫은 적이 많아요. 데모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학교에서 수업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주로 밖에서 교수님과 학생들이 만나서 수업하던 날들이 많았던 특이한 학창시절을 보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공방을 만들어서 공부하기도 했고 작품을 만들어 팔기도 하는 등 특이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기억하는데 제 개인적인 학창시절은 정직하고 착한 학생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대학교 시절이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학교에서 배운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을 해서 저희 동기들이 10여 명 됐나! 거의 다 대학원을 들어간 셈이었어요. 대학원을 졸업하고 더 공부하고 싶어서인지 동기 중 네 명이 미국으로 유학까지 오게 됐어요.
정은미 씨로부터 금속공예의 다양성을 들어보자!
정은미: 금속공예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주얼리(보석 디자인), 장신구 등이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기, 예를 들어서 은쟁반, 은 공기, 은수저. 은 젓가락, 설탕과 프림 그릇 등 이런 것들을 금속공예가들이 많이 만들고, 요즘에는 금속 조각을 실생활에 연결해서 거울 프레임, 액자 이런 것을 금속으로 만들기도 하고 또 책상도 만들고, 그래서 금속 공예에 대한 영역은 참 넓다고 생각해요. 실생활에 많이 응용될 수가 있는데 예를 들어 나무로 책상을 만든 다음에 금속으로 데코레인션을 만들기도 하고 다양하게 이용되는 게 금속공예인 것 같아요.
정 씨가 미국 위스콘신대학원에서 공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정은미: 80년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오게 됐는데 저희 동기가 금속공예가로서 미국 유학 온 첫 번째 세대라고 볼 수 있어요. 한국에서는 주로 기법(테크닉)에 주력해서 교육을 받았는데 위스콘신 대학원에 에서는 미국 교수님들이 금속 공예뿐만 아니라 다른 과목을 각자가 선택해서 수업을 들으면서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쪽으로 인도하시더라고요. 기술적인 면은 작품을 하는 데 있어서의 어떤 도구일 뿐이지, 기술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면서 다른 분여와 다른 재료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결국은 모든 지식이 합해져서 나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어요. 미국에서의 대학원 공부는 각자 시간 될 때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교 작업실에서 작업에 몰두해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고 지금까지의 삶에서 그때처럼 열심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작업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정 씨는 위스콘신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강인함으로 성장하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정은미: 미국 교육은 Concept & Critic(개념과 평론)이 주로 이어지는 것이란 것을 배웠어요. 작품 기법은 학생이 각자 여러 과목을 택해서 배워나가는 것이고, 학교에서 교수님께서 리드하는 것은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동기와 생각, 작가로서 발전되어가는 그런 과정을 지도합니다.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자기 작품에 대해 평가를 해요. 비평이 끝나고 나면 학생들이 다 울어요. 많이 깨지기 때문이에요. 첫 학기 때는 영어도 잘하지 못하는데다 너무 기가 막히고 무섭고 슬퍼서 다른 학생들로부터 질문을 받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끝까지 답변은 했지만 끝나고 나서는 저도 많이 울었지요. 그러면서 차츰차츰 작가로서의 확신과 자신감이 생겨나면서 나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강인함을 배워나가게 되었지요.
정 씨는 11회 개인전을 가진 바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개인전은 언제인가 물어봤다.
정은미: 미국에서 작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주로 미국(베러리 힐즈, 시카고 등)에서 개인전을 많이 했고, 외국에서도 여러 번 했지요. 1996년에 제가 워싱턴 금속공예가 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북미 금속공예가 협회 컨퍼런스를 워싱턴에서 개최한 일이 있었어요. 이때 세계 금속 공예가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과정에서 제 작품이 소개되면서 스코틀랜드에서도 초대를 받아 전시했는데, 전시를 위해 갔다가 스코틀랜드를 기차로 한 바퀴 돌아볼 기회를 가졌었는데 혼자서 하는 여행은 조금은 겁은 나지만 참 인상이 깊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일본에서의 초대개인전도 인상이 남는데 전시를 끝내고 하꼬네 온천여행도 해 보았지요. 이렇듯 개인전은 로컬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여러 나라를 여행할 기회가 많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개인전과 함께 여행했던 추억들이 기억에 남아요.
정 씨에게 각종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도 들어본다.
정은미: 제가 열심히 활동할 때 100명을 뽑는데 천 명 이상이 공모해서 선발되는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공예 대전에 제가 90년대부터 7-8년 동안 매년 뽑혀서 전시하고 작품도 팔고 저를 소개하는 쇼를 했는데 그때만 해도 한국 분 작가들이 없을 때였어요. 그래서 한국인으로는 제가 첫 번째라고 볼 수 있어요. 지금은 한국 분들이 많이 미국에 와서 이런 쇼도 하지만 그때 저의 작품 주제가 특별한 게 있고 운도 좋았고 대상을 차지해서 기뻤던 적도 있고, 그렇게 되면 상금도 받아 좋았고, 컬렉터들 즉 수집가들이 뽑는 어워드(상)에도 수상이 됐었고, 여러 지역에서 하는 쇼에서도 수상했으며 그러나 다른 작가에 비해 수상 경력이 많다고는 볼 수 없어요. 제가 공모를 많이 한 편이 아니고 조용히 작업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그렇지마는 몇 가지 수상경력은 인상에 남아요.
이번 개인전에는 어떤 작품을 전시했는지 물어봤다.
정은미: 이번에 전시한 작품은 대부분 장신구예요. 저는 장신구뿐만 아니라 페인팅도 하고 사진도 하고 3D컴퓨터 작업도 하는 멀티미디어 작가예요. 장신구는 저의 전공인데다가 오랫동안 해 왔던 거기 때문에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고, 이번 전시는 MK 갤러리가 장신구 화랑이기 때문에 목걸이 9점, 브로치 16점, 그리고 귀걸이, 페인팅 등 30여 점을 전시했고, 그리고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색깔로 보는 마음의 교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재 몽고 메리 대학에 강사로 나가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정은미: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 학생들한테 배울 점이 많더라고요. 제가 가르친다고 하지만 학생들과 대화나 학생들 작품을 보고 이 작품이 어떻게 나왔을까 이야기하면서 학생들 지도에 보람도 느끼면서 제가 굉장히 마음이 넓은 사람이 돼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학교에 나간다는 것은 보람되는 일이고 또 저를 통해서 학생들이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즐거워하고 전공하고 싶어하는 것을 보면 참 가르친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구나! 힘든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됐고, 어떤 때 우울한 날 있잖아요. 그런 날도 학생들과 함께하면 우울한 게 다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강사로 학교에 나가는 것을 즐거워하고 보람 있게 생각하고 있어요.
정은미 씨는 남북통일 되면 북한에서 금속 공예를 소개하고 싶단다.
정은미: 물론이지요. 북한에서도 여러 가지 공예 작업이 이뤄지고 있고, 종이 잘라서 예쁜 모양도 만드는 것을 봤거든요. 그러나 아직은 교육 제도라는 것이 서구 교육제도와 같이 어우러져서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마 금속공예가 생소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기회가 되어 북한에 가서 가르치게 된다면 그것만큼 영광이 없을 거고 또 같은 민족이니까 아마 좋은 성과가 있겠죠.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워싱턴 일원에서 활발한 금속공예가로 활동하는 정은미 씨의 작품세계를 찾아가봤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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