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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장군회고록

11)사단장의 고민-김웅수장군회고록 제1부 한국전쟁회고 사단장의 고민 / 육군 급식제 자원 / 우군포가 아군을 포격한다 나는 지휘경험이 없던 만 28세의 청년으로 사단 지휘를 위해 고심 하였었다. 또한 나는 미 3사단을 우측방으로 좌측방은 미 1군단의 미7사단 과 경계되며 군단 예비 사단도 미군 사단인 미 9군단 소속으로 연합작전의 복잡성도 이겨내야 했다. 내가 사단장으로 있는 기간은 휴전 선을 유리케 하기 위해 적의 공세가 심할 때였다. 나의 관측으로는 휴전이 가까워 지면서 미군의 희생을 아끼는 상부의 눈치가 역역하였다. 이러한 실정이 적으로 하여금 유리한 차후의 방어선 선택을 위한 공세의 기회가 되 었다. 철원 평야를 수중에 넣키 위해 백마산이 필요했고 백마산을 위해 평소에 소대 가 점령하고 있던 미 7사단과의 접경선의 배수진이었던 1.. 더보기
10)취소된 철원 원산선 공격계획-김웅수장군회고록 제1부 한국전쟁회고 취소된 철원 원산선 공격계획 / 한국 군단의 지원능력 부족 / 한국군의 아버지 Vanfleet 장군 / 육군 제 2사단장으로 보임 군단 근무중 기억나는 몃가지 일이 있다. 나는 세분의 군단장을 모신 관계로 후일 육군 본부 근무에서 구면된 상사와 같이 일할 수있는 혜택 을 누렸다. 나는 백 장군 으로부터 2사단장으로의 전쟁 말기의 사단장 보직을 받았고 그 밑에서 야전군 참모 장과 그가 참모총장을 중임할 때 육본 편제의 대 개편을 담당하는 책임과 육군 군수 참모부장의 직책을 맡았다. 정 장군 밑에서는 육본 관리 참모부 차장과 작전 교육 국장을 맡은바 있다. 백장군이 군단장으로 재직할 때다. 하루 저녁에는 일반 참모와 군사 고문단원만 작전상황실에 모여 전선을 철원-원산 선 으로 이동하는 공.. 더보기
9)부하 생활을 고민하는 참모총장-김웅수장군회고록 제1부 한국전쟁회고 부하 생활을 고민하는 참모총장 / 위산과다증으로 입학한 육군 참모학교(육군대학) / 준장 승진과 함께 제 2군단 참모장으로 전쟁 당시 민간 차량의 운영은 군으로부터 류용되는 군용차의 부속품과 휘발유 없이는 운영이 불가능 하였다. 심지어 탄피 없이는 불고기 판도 사용 못할 지경 이었다. 점잔케 이야기하면 당시 전쟁을 목적으로 원조된 군원이 민사원조로 전환 되는 결과가 되었으며 이도 제도를 통한 공개적 전환 대신 개인적이고 부정한 과정 을 밟게 되었으며 이 사정을 군에서는 후생 사업이라 이야기했지만 말하자면 국가 재정과 군수품의 부정 유출 결과가 되었다. 청렴하다 평 받은 총장이 이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은 수석 고문단장과 총장간의 상의를 위한 좌석에 동참한 일이 있었다. .. 더보기
나의 긴 인생을 되돌아 보며-김웅수장군회고록 나의 긴 인생을 되돌아 보며 김웅수장군님 2008년 7월 13일 워싱톤 한인교회에서 내 나이 만 85세가 되었다. 아버님이 작고하신 나이다. 평균 수명은 살았다. 긴 인생을 되 돌아본다. 유년기와 학창시절은 공부에 바빴다.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애도 썼다. 나는 유년기를 만주 한국인 독립군 부락에서 그리고 국민학교를 만주 하얼빈에서 교포 학교인 한국 보통 학교를 중학부터는 일본인이 주된 학교에서 자라 중국사람과 일본 사람으로부터 인종적인 차별 의식을 느끼며 자랐다. 그것은 내가 일본군에 입대후에도 예비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본토에서 일본군 소대장을 지나면서도 계속 되었다. 청춘기에는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지 풀리지 아니한 문제와 씨름도 해 보았다. 조국 해방의 환희에 들뜨며 원대한 꿈도 그려 보았다... 더보기
8) 정치 재판에 고민하는 장성들-김웅수장군회고록 제1부 한국전쟁회고 정치 재판에 고민하는 장성들 / 자기 제한을 시도한 업무 전결 한계 규정 / 생활비를 못 따라가는 장교들의 보수체계 그 외에도 이 총장은 거창사건과 거창사건 조사단 방해 사건 서민호씨 재판사건 부산 정치 파동 사건들 군사적이며 정치와 연관된 사건들을 처리해야 했다. 이 사건 들은 정치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직접적 관심사가 되어 재판을 담당하는 군의 고위 장성들에게 고민거리를 주었고 심지어는 재판장 중에는 이박사의 질책을 두려워 몸 을 피하거나 보직과 승진에 제한을 받는 일도 있었다. 나는 비교적 자기를 제한시키 는 성격으로 이런 사건들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두지 아니한 관계로 그의 시시 비비를 지금에 와서 논의할 입장은 되지 못한다. 그 중 부산 정치파동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 더보기
7)북진 명령을 받은 제 8사단-김웅수장군회고록 제1부 한국전쟁회고 북진 명령을 받은 제 8사단 / 중공군 시체로부터의 악취와 하사관 교육 / 육군 차모총장의 비서실장 시절 지리산 토벌 약 두달 후 사단은 전군의 북진 추격작전에 합류하게 되었 다. 제천을 거처 정선 평창 대화 현리 골차기를 통해 인제 원통리를 경유 하진부리로 진격할 때 이종찬 참모 총장의 비서실장으로 부름을 받았다. 북진중의 사단에서 기억나는 일들 이 있다. 사단 사령부가 한국의 약초 산지로 유명한 대화에 잠시 머물때 느낀 일이다. 사단이 주둔되면서 시골 처녀들의 옷색갈이 환해지며 파마 머리가 늘어감을 보았다. 군이 도시문명을 산간벽지에 보급하고 있음을 느꼈다. 대화에서 고지를 점령 한 한 병사가 촌락의 고부를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 하였다. 군기를 잡기 위해 법무관에게 사형을 강요한 .. 더보기
6) 평양방문-김웅수장군회고록 제1부 한국전쟁회고 평양 방문 / 육군 제 8 사단 부 사단장으로 종합학교 재직하던 1950년 11월 말 나는 장인 어른을 모시고 점령도시 평양을 방문 하는 기회를 갖었었다. 1950년9.28 서울이 수복되자 장인 어른은 서울로 일찍 수복 하셨다. 그러나 장인은 10월초 대를 이을 유일했던 외아들의 전사 통지를 받게 되 었다. 나의 유일의 처남 박철모 중위는 전쟁 전에 시흥 갑종 간부 후보생 병기 병과 를 졸업하여 병기 장교가 되었다. 유일의 처남이기에 국방부 병기행정본부에 근무 하도록 도왔다. 본인은 해방후 38선을 넘다 체포되어 해주 가목소에서 쏘련 탄광에 보내지기 직전에 많은 재물을 써서 구출되었다. 한국군 제 1사단이 서울로 진결할 때 나와 상의도 없이 진격 사단에 지원해 탄약 수송을 지휘하던 중.. 더보기
5) 김홍일 장군과 동래 육군 종합학교로-김웅수장군회고록 제1부 한국전쟁회고 김홍일 장군과 같이 동래 육군 종합학교로/육군종합학교 학생연대장/한국전쟁의 소모품 장교 종합학교 출신 소위 결과는 내가 수도사단 지휘하 안동시를 방위하고 있던 전선 연대에 대한 철수 명령 확인을 책임맡게 되었다. 야밤 수도 사단 작전 참모와 동행해 사단에서 기안된 작전 명령을 안동 북단 고지를 방문 윤춘근 연대장에게 전달됨을 확인하고 동이 트기 전 에 부대를 떠나게 되었다. 귀로 당시 낙동강 을 건널 유일의 인도교(현 영동대교) 에 도착한 때는 이미 날이 새어 영동 대교의 북단이 적의 기관총 사수에 의해 점령되어 우리를 행해 사격을 가하여 왔다. 부득불 낙동강에 뛰어 들어 물에 떠나려가다 대안 에 도착 하게 되었다. 철수 명령이 지연된 까닭에 부대의 손실도 많아 결국에는 군단 장의 교.. 더보기
4) 맥아더 장군의 일선 시찰과 중공군 소속 북한 의용군-김웅수장군회고록 제 1부 한국전쟁회고 4) 맥아더 장군의 일선 시찰과 중공군 소속 북한 의용군 / 안양전투에서 실종됨과 제 일군단 인사참모부임 / 이창일중령의 실종과 군단사령부의 의성이동 / 조급히 철수한 안동 방어선 한강 방어선에서의 기억이다. 30일경 김두한씨의 내방을 받았다. 자기 동료들게 총기를 주어 일선 배치를 요구하여 그의 애국심에 감탄하였다. 29일경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미국 지원 병력투입을 위한 여의도 남안 시찰이 있었으며 한강선 방어를 하고 있던 한국 병사로부터 감동을 받았다고 들었다. 시흥지구 전투 사령부 작전주임이던 김종갑 대령이 수행했다 하나 보안을 위해 그의 방문은 공식 통지가 없었다. 김포 반도에 상륙한 적병의 시체에서 길림성 출신의 중국어 일기장 이 발견되었다. 일기장에는 팔로군 소속.. 더보기
3) 북의 6.25 남침위장전술-깅웅수장군회고록 제1부 한국전쟁회고 3) 북의 6.25 남침 위장 전술 /전쟁소식과 수도사단/서울탈출과 한강선방어 전쟁 발발 약 일주일 전으로 기억한다. 북한으로부터 북에 감금되 있던 조만식 선생 과 남에 구속되 있던 남로당 간부 이주하와 김삼룡을 1950 년 6월24일38선상에서 교환하자는 제의가 있었으며 남한 정부의 호응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북한은 이 약속을 1950년 6월 25일 미명에 걸친 남한 기습 공격으로 대신하였다. 북한은 조만식 선생과 이주하 김삼룡의 교환을 남침 위장용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후일 나는 1992년경 당시 쏘련에 망명 중이던 한국전 개전 당시의 북한 육군 작전국장 이었던 유소장을 워싱턴에서 만나 Heritage Foundation 방문 에 동행한 일이 있었다. 그는 개전 일주일 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