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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17)-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10. 미 6군 사령관의 호의와 한국 육군 참모 총장의 방문 미국에 도착한 해 여름으로 기억이 된다. 당시 내가 한국에서 속했든 미 1집단 군단장 Ryan 중장이 미 국내군 6군 사령관으로 부임되어 있었고 그의 사령부가 San Francisco 금문교 근처 Presideo에 있었다. 그가 사령부에서 만나자는 전화가 있어 나의 매부인 강영훈 장군(아리조나 대학)과 1군 사령관이었던 이한림 장군 (산호세에서 유학중)을 같이 초대했다고 들었다. 양인 공히 나 보다 일년전에 미 서부지역에 유학 신분으로 와있었다. 우리는 그가 베푸러준 만찬에 참석하며 사령부내 귀빈 숙소에 유하게 되었으며 다음날 그의 전용 선박으로 맑고 푸른 상항만을 함게 유람하며 ..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16)-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8. 5.16 일주년을 기한 형의 집행 유예로 출소 내가 언도를 받았을 때는 이미 봄이 가차왔을 때이었다. 감방생활 가운데도 종종 외부 소식이 들려왔다. 하루 아침은 세면장에서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된 전 공병감 엄홍섭 소장과 부다치게 되었다. 그는 오래동안 공병감으로 재직함으로 기회를 독점한다는 비난은 받았으나 열심하고 우직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외부에서 나에 관한 이야기가 많으며 곳 출소하게 될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듯고 얼마되지 아니해 나는 출소를 위해 호출되었다. 감방에서 출소를 위해 나오는데 이상국 장군이 세면을 위해 나와 있음을 보았다. 그는 내가 출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장..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15)-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7. 재개된 혁명 재판 라) 10년 형을 선고 받다 나의 재판은 정강 장군과 같이 심리되었다. 나의 죄과중 미 대사 공한 예하부대 하달 죄목은 국제성을 피하기 위해 삭제된다고 하였다. 나는 왜 정강 장군과 같이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 처음에는 이해되지 아니하였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정장군 이 부대 동원을 한 것이 나의 비상령 때문이라는 사실을 정장군으로부터 듯고서야 이해가 되었다. 나는 그것으로 문제가 된다면 군단장의 책임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결과는 내가 징역 10년을 그리고 나의 명으로 사단의 비상이 걸린 정강 8사단장은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내가 명령권자로 인정된다면 정강 사단장은 당연 무죄가 돠어야 했다. 그러나 명령권자보다 ..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14)-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7. 재개된 혁명 재판 가) 워싱턴 포스트 외신 보도와 서대문 형무소 재 입감 12 월 말경이었다. 박정희 장군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도라온 후 나의 재판이 재개된다는 소문이 있은 후 워싱턴 포스트 지에 실린 나의 재판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곤혹의 뜻이 국내 신문을 통해 보도되었다. 혁검 부장인 박창암 대령이 미국의 약소 민족에 대한 전형적 간섭이라며 나로하여금 부당 성명을 발표하도록 매부인 강영훈 중장을 통해 압력을 가하여 왔다. 아버지와 장인 어른은 불리하더라도 혁검의 요구를 드러 주어서는 아니된다는 조언을 주셨다. 강중장의 이야기론 어떤 형식으로던지 신문에 발표함이 가하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구테타 기간 동안 나의 문제로 미국 정부의 개..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13)-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6. 임시적 석방 11월 하순경으로 생각이난다. 헌병 사령부에 위치했던 형명 검찰부에 불려 나갔다.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도 무슨 죄목으로 기소되고 무슨 조건으로 석방된다는 것인지 설명도 못 드렀고 문의도 하지 아니하였다. 지금 되도라보면 제대로 법의 보호나 권한도 허용되지 못한 셈이다. 집이 그리웠고 겨울을 감방에서 지낼 필요 없으니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아내와 김희양 전 부관이 마중 나왔다. 아내는 나를 차에 실고 시내로 들어 갔다. 7세이며 갓 국민학교 일학년에 입학한 둘째 아들 용회가 고열로 입원했는데 급성 맹장염으로 판명 되었으나 열이 높아 수술을 망설이고 있다가 수술을 모험키로 했다고 하였다. 병원은 안국동에 있으며..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12)-김웅수장군회고록 .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6. 임시적 석방 11월 하순경으로 생각이난다. 헌병 사령부에 위치했던 형명 검찰부에불려 나갔다.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까지도 무슨 죄목으로 기소되고 무슨 조건으로 석방된다는 것인지 설명도 못 드렀고 문의도 하지 아니하였다. 지금 되도라보면 제대로 법의 보호나 권한도 허용되지 못한 셈이다. 집이 그리웠고 겨울을 감방에서 지낼 필요 없으니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아내와 김희양 전 부관이 마중 나왔다. 아내는 나를 차에 실고 시내로 들어 갔다. 7세이며 갓 국민학교 일학년에 입학한 둘째 아들 용회가 고열로 입원했는데 급성 맹장염으로 판명 되었으나 열이 높아 수술을 망설이고 있다가 수술을 모험키로 했다고 하였다. 병원은 안국동에 있으며 원..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11)-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5.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 확실한 시기는 기억에 없으나 여름에 들면서 헌병감실에 구속되었든 장성중 유독 나만 혁검에 의해 기소되어 서대문 형무소 독방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나는 무슨 죄로 기소되었는지는 그 때 몰으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나의 재판이 공개될 터이니 헌병 사령부 감방에서 비밀리에 죽임을 당할 위험은 벗어났구나 안도하였던 기억이 난다. 가) 수감 생활을 도와준 장익진 형무의 나는 한국 전젱중에 얻은 위산 과다증으로 공복시 가슴이 쓰라린 병으로 약을 상복하고 있었다. 내가 서대문 형무소로 이관된지 수일후에 누군가 약을 넣어 주었다. 아마 집 사람이나 김희양 부관이 특별히 부탁한 결과이겠지 생각하였다. 형무소에서는 하로 10분 정..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10)-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4. 혁명 검찰의 기소 마포 형무소에서 묵동에 위치했든 헌병 사령부에 옮겨진 것은 다음날인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수용된 장소는 빈 사무실 같았으며 한 국민학교 교실을 연상시켜 주었다. 육군 대위가 감시자로 때때로 방문을 하였고 연금된 장성들이 같은 곳에 수용되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부터의 식사 차입이 허락되어 마포의 좁은 옥사에 비하면 제법 대우를 해준 셈이다.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구약성경을 통독할 기회를 갖었으며 과거 군단 고문관이었든 바드너 대령이 보내준 군 지휘관들의 위대한 결심집을 받았으나 영문판이라 나에게는 통독하기에는 영어 실력이 부족하였다. 나는 걸래와 물을 요구하여 매일 마루를 닥음으로서 위생과 건강을 위지하였다. 하루는..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9)-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3. 5.16 군사 쿠테타 소식과 6군단 마) 주한 미 대리대사의 헌정 질서 복귀 공한 17일아침 8군을 통해 마샬 그린 미국 부대사의 군은 헌정에 의한 정통 정부에 귀속하라는 요청서한이 도착하였다. 당시 대사의 궐석으로 그린 부대사가 대사 대리를 하였다. 참모장 이준학 준장은 이 서한의 부대 하달을 망설였다. 나는 그 공문이 쿠테타 참여 군이나 기타 부대에 대한 주의로 받아드렸으며 나의 의사를 부대에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하여 그 공문의 예하 부대 하달을 지시하였다. 이것 역시 나의 반혁명 죄목의 하나가 되었다. 참모들의 보고에 의하면 야전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이 춘천 방송국을 통해 혁명지지 연설이 있었다고 들었다. 후에 그레고리.. 더보기
5.16 군사 쿠테타 회고(8)-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3. 5.16 군사 쿠테타 소식과 6군단 다) 쿠테타에 가담한 군단 포병에 철수 명령 하달 나는 군단으로 도라와 홍종철 대령을 불러 미 군단장이 알려준 이야기를 전해 주면서 내가 군단장으로 있는한 나의 지휘에 어긋나는 일이 있어서는아니된다는 주의와 함께 그를 집으로 도라가게 하였으나 작전 참모의 직책은 회복시켜 주지 아니하였다. 주요 참모들을 소집하여 포병의 귀환 문제를 논의하였다. 군단 정면 방위를 위해 포병의 복귀는 시급한 문제이었다. 포병 단장인 문재준 대령은 강직하고 정직한 성격으로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평소에 나라 되어가는 형편에 대한 분개를 토로한 적은 있었으나 쿠테타에 관해 기미를 나에게 준 적은 없었다. 나라에 대한 개인의 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