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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화산책

통일문화산책(남북한의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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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통일문화산책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남겨준 전통문화가 광복 이후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지금도 생성돼 오는 서울문화 평양문화의 단면들을 살펴봅니다.

TEASER: 안익태는 미국 음악학교에서 작곡공부를 했는데, 1930년대 초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의 한 교회에 갔다가 올드랭 사인 곡에 맞춰 부르는 우리 애국가를 들은 뒤 애국가 작곡을 결심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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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사전 위키백과에 애국가(愛國歌)는 대한민국의 공식 국가이다. 가사의 작사자는 미상이고, 1919년 안창호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에 삽입해서 부르기 시작하다가 1935년 한국의 작곡가 안익태가 지은 한국환상곡에 가사를 삽입해서 현재까지 부르고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는 1945년 해방 이후 비로소 한반도 전역에 울려 퍼지게 되었는데, 1945년은 아직 남북이 분단되기 이전의 시기로 그때 퍼지기 시작한 애국가를 남한에서는 현재에도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북한에서는 분단 이후 자신의 체제에 맞게 개편한 국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북한 하늘 아래 처음으로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진 소식도 있습니다.

평양 류경 정주영 체육관에서 열린 2013(9월 12일 9월 17일) 아시안컵 및 아시아클럽 역도대회 남자 주니어 85㎏급에 출전한 김우식(19·수원시청) 선수와 이영균(19·고양시청) 선수가 우승과 준우승하면서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흘러나왔습니다. 이 체급에서 두 선수만 출전해 한국이 금메달과 은메달을 나눠 가졌습니다. 시상식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 관중들은 모두 기립해 지켜봤다고 <에이피>(AP) 통신이 전한 바 있습니다.

통일문화산책 오늘은 광복 70년에 다시 확인해보는 남북한 상징노래인 애국가에 대해 북한문화평론가 임채욱 선생으로부터 알아봅니다.

나라의 상징노래인 국가(國歌)는 중요한 국가 상징 중의 하나입니다. 최근 서울에서는 그동안 작사자 미상으로 되어 있던 애국가 작사자를 확인하는 학술모임이 있었습니다. 먼저 지난 8월 서울에서 있었던  애국가 작사자가 확정됐다는 세미나 내용부터 알아봅니다.

임채욱 선생: 지난 8월 1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학술 토론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주장에 의견이 일치되었습니다. 물론 이 토론회가 윤치호 기념사업회에서 개최한 것이지만, 이날 발표한 참석자들은 윤치호가 확실하다는 견해를 객관적으로 제시했다는 것이죠. 그 근거가 4가지인데 첫째, 윤치호 본인이 “내가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밝힌 자필 가사 기록지가 있고 둘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애국가 후렴구가 윤치호가 작사한 또 다른 노래 <무궁가> 가사에도 나온다는 것. 셋째, 1908년에 발간된 찬송가 책 ‘찬미가’에 지금 애국가가 수록되어 있고 넷째, 신한 민보라는 신문, 태평양이라는 잡지, 세계명작가곡 집이라는 단행본 책에서 작사자 윤치호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그동안 애국가 작사자가 밝혀지지 못했나요?

임채욱 선생: 사실 애국가라는 이름으로 나온 가사만도 15편입니다. 이 가운데서 오늘날 한국에서 애국가로 불리는 것과 같은 가사는 1904년에 나온 윤치호 작사로 된 것이죠. 영국 군함이 아시아를 순방하는 중에 인천에 들어왔는데 영국해군 군악대가 예의상 우리나라 국가를 연주하겠다고 해서 고종 왕이 윤치호에게 명하여 국가 가사를 짓게 했으며 윤치호가 밤새도록 작사한 것을 ‘올드랭사인’ 곡에 맞춰 연주한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또 다른 견해가 나오는데 가장 강력한 주장이 도산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것이죠. 안창호가 평양 대성학교에서 보급한 애국가 가사가 가장 먼저라는 주장이죠. 그밖에 목사 최병헌 작사설, 음악교육자 김인식 설이 있죠. 한국 국사편찬위원회는 1955년과 1972년 두 차례에 걸쳐 이 네 사람의 관련 자료들을 검토했으나 확실하게는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애국가 가사 작사자를 모른다고 해서 애국가의 지위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다른 나라 국가도 보면 작사자가 없다든가 공동으로 작사했다든가 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거든요. 본래 국가는 나라의 자연풍토를 찬미하거나 외침에 대한 항쟁을 고취하는 내용이다 보니 여러 사람이 자연스럽게 작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북한 애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임채욱 선생: 북한 애국가는 헌법에 국가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전 헌법에는 국장, 국기, 수도만 규정되어 있었는데 1992년 4월 헌법을 전면적으로 개편하면서 국가가 헌법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북한 애국가는 북한의 상징깃발보다도 먼저 착수돼서 1947년 6월이면 만들어집니다. 착수는 광복되던 바로 이듬해 그러니까 1946년 9월에 김일성이 “우리는 빨리 애국가를 지어서 불러야 하며 머지않아 창건될 우리 군대의 행진곡도 지금부터 준비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부터이지요. 이후 북한의 시인들과 작곡가들이 가사를 쓰고 작곡을 하는데 달라붙었는데 이듬해, 그러니까 1947년 5월에 후보작 가사가 결정되고 이 가사에 맞춰 작곡도 시작되었는데 6월 말 두 개의 후보작이 올라왔지요. 김일성이 들은 뒤에 박세영 작사 김원균 작곡의 작품을 결정합니다. 이때 가사의 한 부분을 김일성이 직접 고칩니다.

작사자 박세영과 작곡가 김원균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임채욱 선생: 작사자 박세영은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배제 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일본에 유학해서 대학을 다녔지요. 1925년 프롤레타리아 문학단체인 카프에 가담했던 사람으로 1946년 초에 월북했지요. 작곡가 김원균은 함경남도 원산 출생으로 작곡가가 되기 전에는 광산노동자, 철공소 도장공으로도 일했던 사람이지요. 애국가 작곡 이전에 이미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곡한 바 있고 6.25전쟁 이후 소련에 한 5년 유학하여 실력을 쌓은 뒤 북한 음악계를 이끌었지요.

북한에서 일제 강점기에도 불리던 애국가를 두고 새로 애국가를 만들게 되는 이유를 뭐라고 합니까?

임채욱 선생: 남한에서 불리던 애국가에 대해서 김일성이 말하기를 “인민의 사상감정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수적이며 곡도 남의 나라 것을 따다 만든 것인데, 곡 자체가 시원치 않다”면서 새로 만들자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김일성은 애국가 창작 방향에 대해서도 지시를 합니다. “아름다운 조국과 슬기로운 투쟁 전통을 가진 조선 인민의 민족적 긍지와 자부를 노래에 담도록 해야 하겠다라는 지시를 하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김일성이 곡도 남의 나라 것을 따라 만들었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사실상 김일성이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일제 강점기 불리던 애국가가 영국의 올드랭사인 곡에 맞춰 부른 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때 이미 그러니까 1936년이 되면 안익태 선생이 이미 새로운 곡을 짓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김일성은 몰랐던 것이지요.

안익태 선생의 애국가 작곡 과정을 말해주세요

임채욱 선생: 안익태는 미국 음악학교에서 작곡공부를 했는데, 1930년대 초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의 한 교회에 갔다가 올드랭 사인 곡에 맞춰 부르는 우리 애국가를 들은 뒤 애국가 작곡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곡이 다른 나라의 올드랭사인 곡에 맞춰 부르기 때문에 우리의 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지요. 안익태는 40여 개 나라의 국가를 수집하고 검토한 끝에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후렴구 부분 그러니까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부분은 미쳐 곡을 못 부치고 있다가 1936년 6월 베를린에 간 어느 날 아침 잠결에 귓전을 맴도는 멜로디가 있어서 그것을 오선지에 옮겼다는 것입니다. 그해 8월에 베를린 올림픽이 열리지요. 한국인 선수들이 일본 선수단으로 갔을 때이지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1등을 할 때의 올림픽이지요. 이때 안익태가 한국인 선수들을 찾아와서 조선응원가를 부르겠다면서 자기가 곡을 부친 이 애국가를 열심히 부르면서 이 곡을 응원가로 쓰라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익태는 뒤에 이 곡을 모티브로 한 유명한 코리아 환상곡을 만들어 내지요. 안익태의 애국의 모습이 눈물겹지 않습니까?

이번에 애국가 작사자로 확인되었다는 윤치호는 누구인가요?

임채욱 선생: 윤치호는 대한제국 시기 개화파 인사였죠. 중국과 미국에서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 인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자주국권운동을 일으켰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우리 주권이 빼앗긴 이후에는 신교육 구국운동을 주로 하면서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도모했던 사람이지요. 하지만 1940년대가 되면 친일단체에 가담하면서 친일활동도 하게 됩니다.

애국가 작사자가 친일인사라는 것인가요.

임채욱 선생: 네, 그렇지만 윤치호가 친일인사가 된 것은 맞지만, 애국가 작사는 친일파가 되기 전에 작사한 것이죠. 이 점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직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것이 국가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란 점입니다. 뒤에 확정된다면 그때 논의해도 될 부분이죠. 그보다는 이 애국가 가사가 항일민족시기에 우리 민족의 슬픔을 달래고 기쁨을 함께하면서 애환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요.

통일문화산책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