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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관련소식

북한서 5년간 남한방송 청취 이야기

수신 잡음을 없애기 위한 전파 방해 방지 안테나와 단파라디오.
수신 잡음을 없애기 위한 전파 방해 방지 안테나와 단파라디오.
RFA PHOTO

북한에서 1975년부터 5년 동안 일본에서 수입된 기중기를 운전하면서 기중기에 부착되어 있는 라디오를 통해 남한 방송을 들었다고 한 탈북자가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밝혔습니다. 이 기중기에 라디오가 그대로 있는 것은 당시 김일성의 선물로 보위부 요원들조차도 함부로 라디오를 철거하지 못해 그대로 장착되어 있었다면서, 밤이나 낮이나 일하면서 남한 방송을 들을 수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지금도 당시 들었던 남한 노래 이성애 가수의 노래 ‘사랑의 오두막집’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한 구절 불러 줬습니다. 자신은 라디오를 들으면서 남한을 동경했지만, 막상 탈북하기까지는 30여 년이 걸렸다며 1년여 남한 생활에서 물을 사먹는 것에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인 줄을 깨달았다고 증언해 줬습니다.

목요대담 오늘은 북한지역의 중부 지역에서 살다 최근 탈북한 김 모씨의 이야기로 함께합니다.

북한에서 남한 방송을 들었다고요. 어떻게 해서 남한 방송을 듣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 1975년도에 일본에서 Hydraulic Crane (기중기)을 수입했어요. 그 기중기에 라디오가 달려 있었어요. 그 기중기는 일반 공장에 보내질 때까지 플라스틱으로 된 붉은 깃발에 노란 글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선물이라고 썼어요. 보위부 사람들도 감히 그 자동차 라디오를 뜯지 못했어요. 왜 못 뜯었나 하면, 그때까지 선물차가 나오긴 처음이에요. 김일성이 직접 선물한다고 준 것으로 그런데 그게 한 22대 정도 됐어요. 그래서 보위부 사람들이 이 라디오를 뜯어야 할지 말아야 되는지 또 주파수를 고정 시켜야 될 지 말지, 망설이다가 끝내 못 뜯었어요. 김일성 지시가 있어야 뜯을 수 있으니까요.

북한에서 남한방송 듣다 적발되면 처벌받는다고 들었는데 주로 어떤 시간에 방송을 들었는지요.

: 그때 그 기중기를 내가 탔어요. 1975년도부터에요. 거기에 라디오 있으니까? 밤일이고 낮일이고 일할 때는 그냥 라디오를 들어요.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라디오를 들을 수가 없어요. 그때는 라디오가 귀했으니까요. 그 당시 소니 라디오가 나왔는데 굉장히 비쌌어요.

1975년 그 당시 같으면 일반 자동차 경우 라디오를 뜯어냈다고 들었습니다.

: 일반사람들은 라디오를 갖는 것은 엄두도 못 내요. 저는 기중기에 장착 되어 있는데 일반 다른 자동차는 뜯었어요. 왜 뜯었느냐 하면, 남조선 방송 듣는다고요. 그런데 이 기중기는 띁지 못하고 머뭇머뭇 하며 한 4년 지났어요. 그러니까 저는 한 5년 탔는데 계속 5년 동안 계속적으로 들었어요.

그 당시 남한방송을 듣고 지금도 기억나는 노래가 있는지요.

: 그런데 남한 방송에서 들었던 아직도 그 노래가 생각이 나요. 남한에서 부르는 노래, ‘찬란한 태양은 우리의 것 / 찬란한 태양은 우리의 것’ 북한에는 이런 노래가 없어요. 김일성이 태양이지! 백성이 태양을 가지고 노래 할 수 없어요.

그럼 여기서 잠시 탈북인 김 모씨가 들었다는 노래 이성애 가수의 사랑의 오두막집 함께 듣겠습니다. 이 노래는 1973년 발표된 노래 이기도 합니다.

저 푸른 하늘 저 멀리 흰구름 쉬어 넘는 곳
내사랑 날 기다리는 사랑의 보금자리 있지요
찬란한 태양은 우리의 것 그 누가 뺐을까
아 정다운 님곁에 언제까지나 영원히 변치말고
사랑의 오두막집엔 오늘도 님 기다리는
사랑의 노래 있어요 아 내사랑 찾아가리

찬란한 태양은 우리의 것 그 누가 뺐을까
아 정다운 님곁에 언제까지나 영원히 변치말고
사랑의 오두막집엔 오늘도 님 기다리는
사랑의 노래 있어요 아 내사랑 찾아가리
내사랑 찾아가리 내사랑 찾아가리

노래에 말씀하신 가사 내용이 들어 있군요. 혹시나 당시 방송 들으면서 잘못된 방송 내용도 있었습니까?

: 다 좋았어요. 방송에서 들은 내용들이요. 다 귀담아 듣곤 했는데, 혹 남한에서 그때 당시 잘못한 것도 있었어요. 북한이 그때까지는 강냉이 밥을 먹는 사람이 없었어요. 옥수수 밥을요. 그런데 북한에서 먹을게 없어서 옥수수 밥을 먹는다는 것을 듣고 이 사람들도 내가 그때를 말하면 정치적으로는 생각 못했지만, 아 이런 경우가 있구나! 오인하는 경우도 있구나! 그때부터 내가 라디오를 들으면서 한국에 오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때가 되지 않으니까 지금에야 올 수 있었어요.

이제 남한에 와서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고요. 어떤 것 이었습니까?

: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데 일반적으로 한국에 와 제일 충격적인 것은 물을 돈 주고 사먹는 거에요. 우리는 물은 돈 주고 사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이게 제일 충격적이고 이게 자본주의 세계이구나! 두 번째는 화장실 화장지를 마음대로 쓰는 것이었어요. 야! 북한에서는 화장지가 없어 풀을 뜯어 항문을 닦는 사람들은 그나마 풀이 옆에 있기 때문에 다행이에요. 변 보고서는 그냥 닦지 않고 팬티를 입고 다녀요.

지금도 생각하면 깜짝깜짝 놀라시는 일도 있었나요.

: 이렇게 말하는 것은 방송사에서 내게 질문한다 해서 좋은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겪은 것 중 제일 충격적인 일이에요. 화장실에서 그렇게 깨끗한 화장지를 쓰고 북한에서는 볼 수 없는 종이에요. 야! 세상에 이런 좋은 세상도 있구나! 하고 깜짝 놀랐어요.

어렵게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 정착하셨는데 자유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 글쎄 내가 이거 ‘자유’에 대해 정리는 못 하겠는데, 내가 공부도 잘 못하다 나니까?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 가 하는 것은 저는 북한에서 항상 붙잡혀서 관리소에 갈까 봐 노심초사 하고 있었어요. 왜 그런가 하면… 나쁜 짓 하지 않은 사람도 붙잡아 갈려면 얼마든지 붙잡아 가니까? 그런데 한국에 와 한 5년 동안은 밤에 자다가 그냥 악몽을 꿔요. 보위부에 붙잡혀 가는 꿈을요. 보위부에 한 번 붙잡혀 가면 끝이에요. 그다음에 다시 살아날 궁리도 하지 않는데,
지금에 와서 자유를 어떻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까?

: 남한에서 자유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자유 즉 모든 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소리를 얼마든지 하고… 정의를 어떻게 해야 할 지 정확하게 모르겠어요.

목요대담 오늘은 북한지역의 중부 지역에서 살다 최근 탈북한 김 모씨의 이야기로 함께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