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04
금년 1월 남한에 입국한 북한군관 출신 한바울 씨는 북한에서 14동안 군관생활을 마치고 집에 와보니 어머니와 형은 굶주림과 병마로 죽었으며 거리에는 굶주림에 지친 어린이들의 동냥행렬과 죽음을 보고 환멸을 느껴 북한을 탈출하게 됐다고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밝혔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북한을 탈출하게 된 동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회견에는 이현기 기자입니다.
북한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한바울: 북한에서 97년도 6월 달에 제대해서 그때 어느 한 공장에 자재 인수원으로 배치를 받았는데 그 공장에 가서 일을 하자니까? 먹고 사는 문제와 일을 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이 갖춰지지 않아서 또 그 일을 단독으로 감당하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여서 제대 후에는 하루도 공장에 출근하지 않았고 일할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군 복무는 몇 년이나 하셨습니까?
한: 14년 동안 군 복무를 했습니다.
이제 집에 돌아오셨는데 가족들은 어떻게 하고 계셨습니까?
한: 제가 14년 동안 편지 한 장도 할 수 없고 가족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는 곳에서 군복무를 했는데 저는 정말 당의 정책에 따라서 후방 가족들을 너무나 잘해주고 14년 동안 당에 충실하게 되면 당에서도 우리가정을 다 먹여주는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또 북한의 경제난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은 제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였고 제대 명령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수많은 어린이들이 굶어죽는 모습과 어린이들이 배고파 가지고 군인들한테 매달려 가지고 밥을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 아이들이 밥을 달라고 할 때 내 품에 있는 돈과 먹을 것을 나누어 줬을 때 그것을 부모들이 말리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고 정말 내가 사는 사회가(공산주의 사회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는데---
그때 당시도 제가 피부적으로 직접적으로 느끼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슴이 아픈 일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집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제가 완전히 변해진 것입니다. 제가 14년 동안 군사복무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 저희 집 고향 뜰에는 풀이 한풀 자랐구요, 집 한구석이 다 무너져 내려가고 있었고 제가 군에 가기 전에 심고 나갔던 나무들도 썩어서 내려 않아 있는 등 그런 상황을 보았습니다.
그때 집으로 돌아와 보니까 우리 어머니는 92년도에 돌아 가셨고 형은 94년도에 돌아가셨습니다. 또 우리 누이 한분이 있었는데 누이는 다른 도시에서 사는 등 모든 가족이 뿔뿔이 헤어진 것입니다. 즉 14년 군복무동안 모든 가정이 파산되는 일들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제 지금까지 내가 살았던 사회에 대한 비난과 또 당에 대한 정책이 얼마나 허무한 가를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군당 책임비서에게 찾아가서 하소연을 했습니다. 내가 그토록 당에 충실하면서 14년 동안 이렇게 당을 위해서 열심히 하고 돌아왔는데 왜 우리가족을 이렇게 됐는가하고 이야기하니까 그때 군당 비서가 하는 말이 “니가 그런 부대에서 당성이 강했다는 니가 왜 그렇게 할 수가 있겠는가”라면서 너는 당성을 잘 못 배웠다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또한 당비서와 다투었던 그 문제가 제 생활에 엄청남 지장을 받게 되고 그 다음부터 불온분자라는 딱지를 쓰게 됐습니다. 그래서 항상 제 밑에는 감시 아닌 감시가 항상 붙어서 이제 내가 이 땅에 살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중국으로 가기를 결심했습니다.
한 탈북군관의 증언 (2부)
2004-11-05
금년 1월 남한에 입국한 탈북자 한바울 씨는 북한 인민군에서 14동안 군관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형이 굶주림과 병으로 사망하고 또 북한 어린이들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구걸행각을 하는 것을 보고 북한정권에 환멸을 느껴 탈출하게 됐다고 자유아시아방송에 밝혔습니다. 오늘 순서에서는 한 씨가 중국에서 번 돈 18,000위안을 조선족에게 사기 당한 내용을 전해드립니다. 회견에는 이현기 기자입니다.
북한을 어떻게 탈출해 중국으로 넘어 오셨습니까? 한바울: 제가 너무나도 생활이 힘들어서 전에 근무하던 부대를 다니면서 그곳의 친구들을 통해 피복류와 쌀들을 가져다가 생계를 유지해 오다가 양강도의 외삼촌을 찾게 됐습니다. 그 삼촌네 집에 갔지만 삼촌네 집에서도 양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고 그곳을 도 떠났습니다. 그리고 해산으로 나왔습니다.
해산에서 기차역이 막히는 바람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 며칠 머물러 있는 동안에 중국을 오가는 한 형제를 만나가지고 중국에 대한 상황을 알게 되었고, 또 그 형제와 같이 중국에 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중국에를 완전히 올려고 한 것이 아니고 중국에서 일정한 돈을 벌어 가지고 조선에 다시 들어가서 살려는 결심을 해서 압록강을 건넜는데 그 압록강 국경경비대에 군 시절 같이 복무했던 친구가 군관으로 있어서 잘 부탁을 해서 중국으로 무사히 가게 됐습니다.
중국에 와서는 어떻게 생활했습니까?
한: 중국에 와서 처음에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우선 말이 통하지 않았고 중국 사람들만 봐도 무서웠고 그때 저에게 가장 큰 힘은 술이었습니다. 매일 술을 먹고 취해 있어야 저에게는 정상이었고 그 술만 깨고 있으면 또 미칠 것만 같아서 그래서 제 주머니에는 항상 담배하고 술이 나의 동무되었고 항상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몇 개월 동안 돈을 벌었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벌었습니까?
한: 제가 중국에서 6개월 정도 일을 했는데 18,000원 정도를 벌었습니다. 18,000원은 엄청난 돈이었는데 중국에 있는 노동자의 1년 수입도 그렇게 되질 않습니다. 10,000원정도 됩니다. 제가 했던 일이 무엇이냐면 인삼밭에서 일을 했고 가을에 접어들면서 잡다한 일을 열심히 했는데 그때 3일이면 중국 돈 600원씩 수입을 얻었습니다.
중국에서 번 돈 18,000위안을 조선족에게 사기 당했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한: 제가 그때 18,000원을 벌어 가지고 겨울에는 그 일하는 곳에는 있을 수 없어서 연길로 오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겨울에는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에 또 그곳에서 있는다면 제 목숨은 단보되지만 누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사람들의 왕래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거기에 있는 분들이 다른 쪽으로 가라고 하면서 가르쳐 준 곳이 연길 이였습니다.
제가 연길로 떠나려고 하는데 마침 조선족이 연길로 가느냐고 자기와 같이 가자고해서 그분과 함께 연기로 출발을 했습니다. 연길로 출발을 하는데 그 가는 도중에 000 이란 곳을 통과를 해야 하는데 그곳을 통과를 하려면 국경경비대들이 탈북자들을 단속하는 초소들이 있습니다. 그 초소를 통과를 해야지 연길까지 무사히 올 수 있는데 저는 항상 잡힐 것을 두려워해서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초소는 점심을 먹는 곳입니다. 점심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타고 초소를 통과해야 하는데 점심을 먹으려고 버스에서 내렸는데 그곳에 경찰들이 왔다 갔다 하니까 저는 무서워서 그 식당에 들어가도 못하고 버스 안에 않아 있는데 조선족이 하는 말이 이제 이 초소를 무사히 통과할 때 까지 그 돈을 자기가 가지고 있겠다는 겁니다. 조선족은 자기가 그 돈을 가지고 있다가 초소를 통과한 다음에 저에게 돈을 다시 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주머니의 한 300원정도만 두고 그 분에게 다 맡겼습니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버스를 타고 출발하는데 그 경찰들이 그 버스는 검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조선족을 찾았는데 이미 그 조선족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한 6개월 동안 애쓰게 벌었던 피땀 흘려 번 돈을 한 순간에 그 분에게 다 빼앗기고 연길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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