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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관련소식/증언-북한생활1

한 탈북군관의 증언 (4부)

2004-11-09

금년 1월 남한에 입국한 탈북자 한바울 씨는 북한 인민군에서 14동안 군관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형이 굶주림과 병으로 사망하고 또 북한 어린이들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구걸행각을 하는 것을 보고 북한정권에 환멸을 느껴 탈출하게 됐다고 자유아시아방송에 밝혔습니다. 4부 순서에서는 한 씨가 교회에서 ‘간첩’ 누명을 받은 이야기 입니다. 회견에는 이현기 기자입니다.

한바울 씨께서는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첫 소감은 어떠했습니까?

한바울: 11시 그 교회 총무라는 분이 왔는데 제가 맨 처음 교회에 갔던 곳이 00교단 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총무가 왜 자꾸 이런 사람들을 받느냐고 해서 상처를 받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고 잠잘 곳이 없는 내가 그 사람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순종했습니다. 그 사람이 데려간 곳이 바로 그 교회 사무실이었습니다.

그 사무실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새벽 4시가 되니까 그 어머니가 오셔서 저를 깨우는 것입니다. 왜 깨우느냐고 물러보았더니 새벽기도에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나갔는데 그날 목사님이 부르는 찬송가 소리에 무엇인가 홀렸다는 생각이 들구요. 마귀 장난에 놀아난 생각이 들드라구요.

그때 목사님이 불렀던 찬송가가 바로 ‘만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다 가지고’, 그 찬송을 부르는데 처음으로 기독교 노래를 듣는 순간에 얼마나 부끄럼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먹을 것도 없고 잘 곳도 없고 갈 데도 없는 신세여서 이런 곳에도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교회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교회에서 첫 시련으로 ‘간첩’이란 누명을 받았다는데 어떻게 간첩이란 누명을 받았습니까?

한: 그 시련이 무엇이냐하면 고향에 있던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것은 바로 어린 아이였습니다. 그 교회에 오니까 한 30명 정도 어린이들이 그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먹여주고 키워주고 했습니다. 그 속에 바로 우리 고향에 있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군사복무를 하면서 군관학교도 갔다 왔지 하니까 그 어린이가 제에 대해서 크게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제대를 해 가지고 안전부에 입대한다고 안전부 문건도 쓰고 이런 경력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저를 알아본 것입니다.

저는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 아이는 저를 알아보고 목사님에게 말한 것입니다. 저 사람은 북한에서 군인 등을 했다고 하니까 목사님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저런 사람이 탈북할 수 있는가 하면서 저 사람 분명히 간첩이라고 지칭이 되어 그동안 그렇게 사랑스럽게 하던 사람들이 순간에 다 외면해 버리고 말드라구요. 뭐 밥도 같이 먹지 않고 길가에서 나를 만나면 다 외면하고 돌아서고 순간에 그런 사람들에게 배척당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서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그 원인을 알아보니까 내가 간첩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목사를 두들겨 팼다는데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한: 그해 12월 25일 날 성탄절에 너무나도 기가 막혔습니다. 그때 마침 교회에 나가니까 성탄절에 설교를 하시는데 그 내용이 한 영혼이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설교를 듣는 순간에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땅바닥에 성경책을 내 팽개치고 설교하는 목사님 강단에 뛰어 올라가서 멱살을 잡고 목사님을 두들겨 팼습니다.

그렇게 패면서 내가 했던 말이 천하보다도 귀중하게 여기는 당신들인데 그러면 내가 진짜 간첩이라면 당신들이 나를 교양개조해서 하나님편으로 만드는 것이 당신들의 임무가 아니냐고. 이 말한 마디에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드라구요. 그렇게 목사님을 때려놓고 나니까 그 교회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며칠 정도 더 머물러 있다가 바로 설날 직전에 교회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때 저를 돌봐주던 어머니가 이제 떠나면 어떻게 설날을 세겠는가고 했지만 00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00에 와 가지고 북한사역지라는 곳에 들어와 가지고 일대일 제자 양성 절차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교육을 받을 때 목사님께 했던 행동이 얼마나 후회가 되는지 많은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도 전화로 용서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98년도 11월 달부터 2002년도 2월 달까지 신학교를 다녀서 졸업하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