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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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일원에 사는 실향민들은 남한이 고향인 사람들보다 고향을 사랑하는 애정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주 고향 사람과 만나 고향이야기를 나누고 통일이 되면 고향을 찾아가 소망을 이루고 싶다고 말합니다.
실향민들의 애절한 사연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소망을 소개하는 ‘보고 싶은 얼굴’ 오늘은 워싱턴 일원에 사시는 분 가운데 ‘황해도 옹진군이 고향인 김수영 씨의 고향 그리는 마음’을 전해 드립니다.
미국에 산지 45년이 된다는 김수영 씨에게 지금도 고향이 그리운지를 물어봤습니다.
미국에 온 지가 아마 45년쯤 되는가 봅니다. 한 번도 고향을 잊은 적은 없었고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고 자주 꿈에 고향이 보이곤 해서 죽는 날까지 고향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김 씨는 어머니가 지금도 살아 계시는지 운명하셨는지를 몰라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산소가 북한에 있고 어머니도 돌아가신 것 같은데 어디서 운명하셨는지 알 수가 없어 가슴이 아프고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김 씨는 고향 시절의 푸짐한 인심과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달래고자 고향 사람의 모임에 참가한다고 설명해 줍니다.
향우회에 나오는 이유는 첫째 고향 사람들, 즉 부모님과 같이 살았던 사람들, 고향 시절의 푸짐한 인심, 고향 사람들과 고생과 낙을 같이했던 시절을 그리면서, 죽기 전에 고향에 가서 아버지 산소에 가보고 싶습니다. 지금도 가면 아버지 산소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고픈 마음이 끊임없어서 행사에 나온 동기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달래는 방법은 이렇게 모임에 나오는 것이 먼 타향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 같습니다.
김 씨의 나이는 현재 75살이시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주신 세발 자전거의 향수로 가득합니다.
아버지가 고향에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고향에서 아버지가 유지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서울로 이주해서 형들과 어머니 함께 살았습니다. 항상 잊히지 않은 일로는 어렸을 때 아버님이 제가 막내이기 때문에 남들이 없는 세발 자전거도 사다주셨던 것이 생생하게 남아있고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보쌈 놀이 연극’을 함께 하던 친구들이 그립다고 김 씨는 회상합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집에서 연극을 했습니다. 대변을 보쌈에다 싸 가지고 방안에다 놓는 연극을 그 당시 재현했습니다. 보쌈을 친구에게 주면서 이것이 내가 주는 선물이다 펴봐라, 친구가 그걸 펴 보다 손에 뭇고 해서 웃음바다가 됐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 친구들이 어디에 있는지 살았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보지 못한 어린 시절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김 씨는 호소합니다.
친구들을 만나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천에 많이 사는 것 같아요. 제가 사는 곳은 이남이었습니다. 6 25가 지나고서 이북에 속했어요. 그 이후 단절이 되어서 오고 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돼서 오랜 친구들을 만날 수도 없게 됐고 어머니도 그 당시에 그쪽에 계셨기 때문에 왕래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을 만날 수도 없게 됐고 어머니도 그쪽에 계시기 때문에 왕래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6 25전쟁으로 고향 옹진군 오화도가 북한에 편입된 것이 항상 원망스럽다고 김 씨는 말합니다.
항상 원한이 되는 것은 왜 6 25가 일어나서 옹진군 오화도가 이북으로 편입됐는가 하는 것이 항상 원망이 되고요. 앞으로 통일되면 한번 가서 고향에 아직도 살아 계시는 분이 많은 것 같은데 방문해서 그 옛날을 끄집어 내고 싶습니다.
‘보고 싶은 얼굴’ 오늘은 ‘황해도 옹진군이 고향인 김수영 씨의 고향 그리는 마음’을 전해 드렸습니다.
이 시간에 ‘고향에 띄우는 편지’ 보내 주실 분은 서울 중앙우체국 사서함 4100호 자유아시아방송이나 이 메일 nk@rfa.org 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보고 싶은 얼굴’ 제작 구성에 이현기 입니다.
미국에 산지 45년이 된다는 김수영 씨에게 지금도 고향이 그리운지를 물어봤습니다.
미국에 온 지가 아마 45년쯤 되는가 봅니다. 한 번도 고향을 잊은 적은 없었고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고 자주 꿈에 고향이 보이곤 해서 죽는 날까지 고향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김 씨는 어머니가 지금도 살아 계시는지 운명하셨는지를 몰라 안타깝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산소가 북한에 있고 어머니도 돌아가신 것 같은데 어디서 운명하셨는지 알 수가 없어 가슴이 아프고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김 씨는 고향 시절의 푸짐한 인심과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달래고자 고향 사람의 모임에 참가한다고 설명해 줍니다.
향우회에 나오는 이유는 첫째 고향 사람들, 즉 부모님과 같이 살았던 사람들, 고향 시절의 푸짐한 인심, 고향 사람들과 고생과 낙을 같이했던 시절을 그리면서, 죽기 전에 고향에 가서 아버지 산소에 가보고 싶습니다. 지금도 가면 아버지 산소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고픈 마음이 끊임없어서 행사에 나온 동기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을 달래는 방법은 이렇게 모임에 나오는 것이 먼 타향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 같습니다.
김 씨의 나이는 현재 75살이시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주신 세발 자전거의 향수로 가득합니다.
아버지가 고향에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고향에서 아버지가 유지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서울로 이주해서 형들과 어머니 함께 살았습니다. 항상 잊히지 않은 일로는 어렸을 때 아버님이 제가 막내이기 때문에 남들이 없는 세발 자전거도 사다주셨던 것이 생생하게 남아있고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보쌈 놀이 연극’을 함께 하던 친구들이 그립다고 김 씨는 회상합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집에서 연극을 했습니다. 대변을 보쌈에다 싸 가지고 방안에다 놓는 연극을 그 당시 재현했습니다. 보쌈을 친구에게 주면서 이것이 내가 주는 선물이다 펴봐라, 친구가 그걸 펴 보다 손에 뭇고 해서 웃음바다가 됐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 친구들이 어디에 있는지 살았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보지 못한 어린 시절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김 씨는 호소합니다.
친구들을 만나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천에 많이 사는 것 같아요. 제가 사는 곳은 이남이었습니다. 6 25가 지나고서 이북에 속했어요. 그 이후 단절이 되어서 오고 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돼서 오랜 친구들을 만날 수도 없게 됐고 어머니도 그 당시에 그쪽에 계셨기 때문에 왕래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을 만날 수도 없게 됐고 어머니도 그쪽에 계시기 때문에 왕래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6 25전쟁으로 고향 옹진군 오화도가 북한에 편입된 것이 항상 원망스럽다고 김 씨는 말합니다.
항상 원한이 되는 것은 왜 6 25가 일어나서 옹진군 오화도가 이북으로 편입됐는가 하는 것이 항상 원망이 되고요. 앞으로 통일되면 한번 가서 고향에 아직도 살아 계시는 분이 많은 것 같은데 방문해서 그 옛날을 끄집어 내고 싶습니다.
‘보고 싶은 얼굴’ 오늘은 ‘황해도 옹진군이 고향인 김수영 씨의 고향 그리는 마음’을 전해 드렸습니다.
이 시간에 ‘고향에 띄우는 편지’ 보내 주실 분은 서울 중앙우체국 사서함 4100호 자유아시아방송이나 이 메일 nk@rfa.org 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보고 싶은 얼굴’ 제작 구성에 이현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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