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 탈북자 김춘애씨① “여기자 석방 노력 보며 미국에 감명”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09-08-12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 이 시간은 탈북자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탈북자 김춘애 씨와 함께하는 첫 번째 시간입니다.
김춘애 씨는 북한 인민군 중대장 출신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1997년 큰딸에 이어 1999년과 2000년 세 차례의 탈북과 강제 북송 중에 잃어버렸던 두 딸을 찾았고 북한의 아들도 탈북해 2003년 6월 한국에 정착해 사는 탈북인 주부로서 또 방송인으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 씨는 평양 출신으로 평양시도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1995년 하순부터 배급이 중단되어 가정주부로서 또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살기가 어려워 탈북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 오늘은 김춘애 씨가 미국에 온 소감과 탈북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질문 : 미국에 오신 소감을 이야기해 주시지요?
답변 : 제가 워싱턴에 3번째 왔습니다. 2006년에 두 번 왔다 갔는데, 다시는 못 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3번째 와서 보니 워싱턴에 온 게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 북한에서 살 때 미국에 관해 어떻게 배웠습니까?
답변 : 처음에 미국에 올 때는 조금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에서 미국에 대해 세뇌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북한에선 미국 하면 침략자, 제국주의, 승냥이 이렇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무서운 사람으로 알았는데 미국에 와 보니까. 우리가 비록 언어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지만은 우리(탈북인들)의 아픈 사연을 듣고 같이 눈물도 흘러주고 마음의 상처를 다듬어주는 그런 모습을 보고 참 우리가 북한에서 50년 동안 교육받았던 쇠뇌 교육의 내용과 다른 것을 알았습니다. 미국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참 친절하고 다정한 인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질문 : 북한에 억류 중인 2명의 여기자가 최근 석방되어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전직 클린턴 대통령이 직접 북한을 방문해 자국민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미국을 보고 어떤 것을 느꼈습니까?
답변 : 당일 TV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솔직히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미국사람 하면 인정도 없고 감정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국민의 한 사람 한 사람을 귀중히 여겨준 데 대해서 감탄했습니다. 북한은 미국에 비하면 작은 나라인데 전직 대통령이 직접 가서 자기 국민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 우리 북한도 인민을 위해서 일하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나를 생각했습니다.
질문 : 김춘애 씨는 북한에서 장교로 근무해서 북한에서는 나름대로 어렵지 않게 살았지 않았나 하는 일반적인 생각을 해 봅니다만 왜 북한을 탈출했습니까?
답변 : 우리 평양시도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1995년 하순부터 배급이 중단되었습니다. 사실 군 생활을 할 때는 호랑이 담배 피울 때이고요. 가정주부로서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배급이 중단되니까.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탈북해 남한에 오게 됐습니다.
질문 : 몇 년 도에 탈북했습니까?
답변 : 제가 1997년도 10월에 탈북해서 중국에서 약 6년간 생활했습니다. 중국에서 6년이란 세월은 부모로서 엄마로서의 내 사명을 다하려고 잃어버린 자식과 빼앗긴 자식을 찾으려고 중국에서 6년이란 세월을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수모와 멸시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질문 : 중국에서 탈북자로서의 생활을 소개해 주시지요?
답변 : 우선 중국의 타향생활로서 중국에서 난민을 인정받지 못하는 지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말 못하는 타향살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에서 숨어 살아야 하고 아직 탈북 난민이라는 인정을 못 받았기 때문에 중국 공안에 신고되면 무조건 잡혀가게 됩니다. 그래서 숨어 살아야 하지요. 우리가 국적이 없다 보니까. 중국에서 탈북 여성들이 90% 이상이 인신매매됩니다. 인신매매된 탈북여성들이 여기저기 팔려 다니다 보니까. 인간 이하의 생활을 맞게 됩니다.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탈북여성들의 심정입니다.
질문 : 정말 회고하고 싶지 않겠지만, 중국에서 탈북과정에 있었던 어려움도 회고해 주시지요?
답변 : 제가 직접 겪은 이야기입니다. 1999년 10월에 큰딸을 찾으러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두만강을 넘어 만난 게 인신매매단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인신매매꾼이 돈을 벌어야만 딸을 찾을 수 있다며 인도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돈만 벌어 광고하면 큰딸을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인신매매 꾼들이 인도하는 화룡시로 들어가다 보니까. 거기 탈북여성들이 한 집에 다섯 명이나 있었습니다. 16살 딸과 함께 있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채소를 사러 나갔다가 집에 오니 딸이 없어졌습니다. 주인에게 딸이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자기들도 모른다. 엄마 찾으러 떠났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여기 가두어 놓고 옆집에 알세라 모를세라 큰소리도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우리 딸이 문밖을 나갈 수 있느냐고 말을 하니까. 자기 친구가 왔는데 따라나갔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두 눈을 똑바로 뜨고서 16살 딸을 빼앗긴 셈이지요.
그래서 그 집에서 나와 딸을 찾으러 화룡시내 골목을 다 다녔습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 타향살이 신세에서 어떻게 딸을 찾겠습니까? 그러다가 탈북여성 한 명을 만났습니다. 함께 중국 연변 팔도를 갔는데 그 집에서 사흘 동안 있었는데 옆집의 사람이 놀러 와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줬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저는 여기 살려고 온 것이 아니라 큰딸 찾으러 왔다가 작은딸까지 빼앗겼다 하니까요.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그분이 큰딸과 작은딸도 찾아 주겠다 해서 그때 망설였습니다. 내가 중국에 큰딸 찾으러 왔다 작은딸까지 빼앗겨 말문이 다 막히고 눈물이 말랐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모성애를 잃지 말고 자식을 찾아야겠다는 단 한 가지 목적 또 주변의 사람들이 넓은 중국땅에서 자식을 찾자면 누군가 의지를 해야지 혼자서는 못 찾는다고 이야기를 해 주더라고요. 중국땅에 와서 자식을 찾으려면 누군가에게 의지해야겠다 해 그분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분에게 화룡에 있던 집의 약도를 그려줬습니다. 그분이 화룡에 가서 물어보니 그런 모녀를 모른다고 하니까 결국은 화룡시의 깡패를 데리고 가서 물으니까. 그제야 그런 모녀가 있었지만, 현재는 소식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삐삐라는 게 있었는데 그 친구의 삐삐 번호만 알아왔습니다. 아무리 삐삐를 해도 연락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3개월 후에 소식이 왔는데 둘째딸이 목단 강 인근에 중국 돈 4,000위안에 팔렸다고 했습니다. 그래 딸이 있는 곳의 주소를 알아내서 가보니 응석 부릴 나이니까. 울기만 해서 3개월 동안 한 80세 되는 할머니가 데리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돈을 주고 딸을 찾아왔습니다.
그 이후 저희 모녀는 돈 4천 위안 때문에 머슴처럼, 꼬리 없는 짐승처럼 일했습니다. 1998년도에는 탈북여성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북한 내에서 탈북하다 잡히면 공개처형하고 감옥에 보내고 하니까. 탈북여성들이 많지 않으니까. 중국 내에서는 납치 꾼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인신매매 꾼들이 중국에서 팔려간 여성들을 다시 납치해다가 내몽고 쪽에 다시 팔아먹는 그런 납치꾼들이 생겼는데 그 납치꾼에게 우리가 납치됐습니다. 화령시로 갔습니다. 그때 우리를 1만 위안에 팔려고 할 때 안가겠다고 싸움이 나서 이웃집의 신고로 공안에 붙잡혀 북송되었습니다. 북송이 됐다가 다시 탈출을 해서 나왔습니다.
제가 북송된 지 3일 만에 함경북도 무산군 노동단련 대에서 탈출했습니다. 딸을 거기다 두고서 말입니다. 왜냐면 내가 살아야만 큰딸도 찾을 수 있고 작은딸도 찾을 수 있고 평양에 두고 왔던 아들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탈출을 했는데 갈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두만강을 넘을 때 두만강에 피눈물을 뿌리며 건널 때의 심정이란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만강에 뛰어들 때는 알았는데 장마철에 물이 불어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제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두만강 영현이라는 데에 한 노인 집에 누웠더라고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으니까? 두만강에 빠졌는데 중국 쪽에서 젊은 사람이 일하다가 분명히 여자 한 분이 물에 뛰어들었는데 올라오지 않아 살피다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그분이 건져내어 살았습니다. 중국의 두만강 쪽에는 인신매매 꾼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다시 팔려가게됐는데 도망쳤습니다. 왜 도망했느냐면 처음 있던 팔도라는 곳의 전화를 동생도 알고 있고 딸도 알고 있잖아요.
둘째딸을 노동단련 대에 두고 도망쳤지 않아요. 내가 아무리 머슴처럼 살았지만, 그곳을 가야만이 우리 둘째 딸이 단련 대에서 살아나오면 다시 엄마를 찾아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서 한 석 달을 일하는데 갖은 고생 끝에 둘째 딸이 다시 연락되고 찾아왔습니다. 딸과 함께 살다가 2000년도에 다시 인신 매매꾼에 또다시 납치되었습니다. 밤에 자다가 불의의 습격한 납치 꾼에게 납치되었습니다. 이 인신매매 꾼들은 우리를 한번 넘기고 다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공안처럼 빼앗아서 두세 번 팔려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딸과 함께 팔려 다니는 것은 짐승보다 못한 일이잖아요. 그래서 거기서 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신고가 돼서 잡혔는데 화령변방대에 두번이나 잡혔습니다. 그래서 무산군 보위부에 두 번이나 북송됐습니다. 북송됐다. 다시 탈출하게 됩니다.
청진 집결 소에서 평양으로 이송도중에 둘째 딸과 청진역에서 탈출했습니다. 다시 함경북도 무산까지 와서 다시 두만강을 넘게 됩니다. 단지 내가 돈을 벌어야만 중국의 큰딸도 찾을 수 있고 북한의 아들과 남편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탈출하게 됩니다. 그러나 또다시 납치 꾼에게 납치되었습니다.
내몽고에 있는 한족에게 팔려고 넘겼는데 기차역에서 탈출했습니다. 그 이후 살던 집으로 다시 갔습니다. 중국에서 인신 매매꾼에게 3-4번 팔리고 납치 꾼에게 납치당하면서 말 못하는 타향살이 중국에서 짐승보다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중국의 인신매매 꾼들은 북한여성들을 소나 돼지보다도 값없게 여깁니다.
참 그런 수모를 받을 때 옛날 북한에서 이런 교육을 받았습니다. 해방 전에 올바른 영도자가 없어서 북한인민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서 중국으로 만주로 갔다. 이런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솔직히 북한주민들이 영도자가 있지 않습니까?
내로라하는 김일성 수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있는데 이런 좋은 지도자를 만났다고 하지만 왜 내가 스스로 탈북을 해야 하나 옛날에는 올바른 지도자 없어서 탈북했지만, 지금은 올바른 지도자가 있다는 내로라하는 내 땅에서 왜 내가 탈북을 해야 하나! 이런 서러움으로 울고 중국에서 자식들을 찾지 못한 눈물 속에서 살다 보니까. 이렇게 안경을 끼게 됐고 머리는 탈모증이 생겨서 머리가 다 빠지게 됐어요.
질문 : 가족들을 중국에서 어떻게 만나 셨습니까?
답변 : 제가 2번이나 북송됐습니다. 북송되어 다시 넘어올 때는 연변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 생각이 들어 청도로 들어갔습니다. 둘째딸과 죽는 힘을 다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돈을 벌어야만 광고를 해서 큰딸도 찾을 수 있고 북에 두고온 남편과 아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죽도록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쪽으로는 광고를 냈습니다. 청도에서 2001년 모 잡지에 김춘애 어머니께서 큰딸을 애타게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냈습니다. 한쪽으로는 북한의 형제들에게 돈을 보내면서 아들을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몇 달 후에 연락이 왔는데 형제에게서 아들이 죽었다고 다시는 찾지 말라고 했는데, 저는 그때 그랬습니다. 죽지 않았다. 엄마와 자식 간의 모성애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형제에게 부탁을 안 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겠다고 했는데 돈을 벌어서 북한에 보낸 지 1년 만에 아들을 찾았습니다.
잡지에 광고를 냈지 않아요. 마침 우리 큰딸이 목단 강 쪽에서 일하다가 아는 사람의 집에 갔는데 잡지가 있더래요. 잡지를 보니까. 엄마가 자기를 찾는다는 광고가 나온 것을 보았답니다. 저는 광고를 내고서는 손 전화기를 항상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밤에 잘 때도 목에 걸고 자곤 했습니다. 만일 광고를 보면 언제라도 전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02년 12월 16일에 저녁 7시에 난데없는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으니까 어떤 남자분이 김춘애 씨가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맞다고 하니까. ‘잠깐만’하고 전화를 바꾸는데 큰딸이 전화를 하드라고요. 그땐 참 꿈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큰딸과 그날 통화를 하고 4일 만에 둘째딸이 친구와 함께 언니 있는 곳에 가서 큰 언니를 데려왔고 이렇게 해서 큰딸을 찾고 북한에는 계속 돈을 벌어서 보냈지 않아요. 2003년 1월에 동생이 아들을 찾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아들하고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2003년 3월 8일에 우리 아들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래서 온 식구가 다 만났지 않아요. 만나고 보니까 아빠는 없더라고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더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도 다 찾았는데 또 내가 2번씩 북한에 잡혀가곤 하니까. 고향에 가곤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곤 단 한 가지 내가 남한으로 가야만이 자식들을 데리고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중국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왜냐면 중국에 살려면 숨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지 않아요. 두 딸과 아들을 데리고 베트남과 캄보디아 태국을 거쳐 2006년 6월에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MC :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 다음 시간에는 탈북자 김춘애 씨와 북한으로 강제북송되는 과정에서 맞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 나눕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기였습니다.
김 씨는 평양 출신으로 평양시도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1995년 하순부터 배급이 중단되어 가정주부로서 또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살기가 어려워 탈북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 오늘은 김춘애 씨가 미국에 온 소감과 탈북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질문 : 미국에 오신 소감을 이야기해 주시지요?
답변 : 제가 워싱턴에 3번째 왔습니다. 2006년에 두 번 왔다 갔는데, 다시는 못 올 줄 알았는데 이렇게 3번째 와서 보니 워싱턴에 온 게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 북한에서 살 때 미국에 관해 어떻게 배웠습니까?
답변 : 처음에 미국에 올 때는 조금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에서 미국에 대해 세뇌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북한에선 미국 하면 침략자, 제국주의, 승냥이 이렇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무서운 사람으로 알았는데 미국에 와 보니까. 우리가 비록 언어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지만은 우리(탈북인들)의 아픈 사연을 듣고 같이 눈물도 흘러주고 마음의 상처를 다듬어주는 그런 모습을 보고 참 우리가 북한에서 50년 동안 교육받았던 쇠뇌 교육의 내용과 다른 것을 알았습니다. 미국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참 친절하고 다정한 인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질문 : 북한에 억류 중인 2명의 여기자가 최근 석방되어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전직 클린턴 대통령이 직접 북한을 방문해 자국민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미국을 보고 어떤 것을 느꼈습니까?
답변 : 당일 TV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솔직히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미국사람 하면 인정도 없고 감정도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 국민의 한 사람 한 사람을 귀중히 여겨준 데 대해서 감탄했습니다. 북한은 미국에 비하면 작은 나라인데 전직 대통령이 직접 가서 자기 국민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 우리 북한도 인민을 위해서 일하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나를 생각했습니다.
질문 : 김춘애 씨는 북한에서 장교로 근무해서 북한에서는 나름대로 어렵지 않게 살았지 않았나 하는 일반적인 생각을 해 봅니다만 왜 북한을 탈출했습니까?
답변 : 우리 평양시도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1995년 하순부터 배급이 중단되었습니다. 사실 군 생활을 할 때는 호랑이 담배 피울 때이고요. 가정주부로서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배급이 중단되니까.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탈북해 남한에 오게 됐습니다.
질문 : 몇 년 도에 탈북했습니까?
답변 : 제가 1997년도 10월에 탈북해서 중국에서 약 6년간 생활했습니다. 중국에서 6년이란 세월은 부모로서 엄마로서의 내 사명을 다하려고 잃어버린 자식과 빼앗긴 자식을 찾으려고 중국에서 6년이란 세월을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수모와 멸시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질문 : 중국에서 탈북자로서의 생활을 소개해 주시지요?
답변 : 우선 중국의 타향생활로서 중국에서 난민을 인정받지 못하는 지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말 못하는 타향살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에서 숨어 살아야 하고 아직 탈북 난민이라는 인정을 못 받았기 때문에 중국 공안에 신고되면 무조건 잡혀가게 됩니다. 그래서 숨어 살아야 하지요. 우리가 국적이 없다 보니까. 중국에서 탈북 여성들이 90% 이상이 인신매매됩니다. 인신매매된 탈북여성들이 여기저기 팔려 다니다 보니까. 인간 이하의 생활을 맞게 됩니다.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탈북여성들의 심정입니다.
질문 : 정말 회고하고 싶지 않겠지만, 중국에서 탈북과정에 있었던 어려움도 회고해 주시지요?
답변 : 제가 직접 겪은 이야기입니다. 1999년 10월에 큰딸을 찾으러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두만강을 넘어 만난 게 인신매매단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인신매매꾼이 돈을 벌어야만 딸을 찾을 수 있다며 인도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돈만 벌어 광고하면 큰딸을 찾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인신매매 꾼들이 인도하는 화룡시로 들어가다 보니까. 거기 탈북여성들이 한 집에 다섯 명이나 있었습니다. 16살 딸과 함께 있었습니다. 일주일 만에 채소를 사러 나갔다가 집에 오니 딸이 없어졌습니다. 주인에게 딸이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자기들도 모른다. 엄마 찾으러 떠났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여기 가두어 놓고 옆집에 알세라 모를세라 큰소리도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우리 딸이 문밖을 나갈 수 있느냐고 말을 하니까. 자기 친구가 왔는데 따라나갔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두 눈을 똑바로 뜨고서 16살 딸을 빼앗긴 셈이지요.
그래서 그 집에서 나와 딸을 찾으러 화룡시내 골목을 다 다녔습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 타향살이 신세에서 어떻게 딸을 찾겠습니까? 그러다가 탈북여성 한 명을 만났습니다. 함께 중국 연변 팔도를 갔는데 그 집에서 사흘 동안 있었는데 옆집의 사람이 놀러 와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줬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저는 여기 살려고 온 것이 아니라 큰딸 찾으러 왔다가 작은딸까지 빼앗겼다 하니까요.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그분이 큰딸과 작은딸도 찾아 주겠다 해서 그때 망설였습니다. 내가 중국에 큰딸 찾으러 왔다 작은딸까지 빼앗겨 말문이 다 막히고 눈물이 말랐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모성애를 잃지 말고 자식을 찾아야겠다는 단 한 가지 목적 또 주변의 사람들이 넓은 중국땅에서 자식을 찾자면 누군가 의지를 해야지 혼자서는 못 찾는다고 이야기를 해 주더라고요. 중국땅에 와서 자식을 찾으려면 누군가에게 의지해야겠다 해 그분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분에게 화룡에 있던 집의 약도를 그려줬습니다. 그분이 화룡에 가서 물어보니 그런 모녀를 모른다고 하니까 결국은 화룡시의 깡패를 데리고 가서 물으니까. 그제야 그런 모녀가 있었지만, 현재는 소식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삐삐라는 게 있었는데 그 친구의 삐삐 번호만 알아왔습니다. 아무리 삐삐를 해도 연락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3개월 후에 소식이 왔는데 둘째딸이 목단 강 인근에 중국 돈 4,000위안에 팔렸다고 했습니다. 그래 딸이 있는 곳의 주소를 알아내서 가보니 응석 부릴 나이니까. 울기만 해서 3개월 동안 한 80세 되는 할머니가 데리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돈을 주고 딸을 찾아왔습니다.
그 이후 저희 모녀는 돈 4천 위안 때문에 머슴처럼, 꼬리 없는 짐승처럼 일했습니다. 1998년도에는 탈북여성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북한 내에서 탈북하다 잡히면 공개처형하고 감옥에 보내고 하니까. 탈북여성들이 많지 않으니까. 중국 내에서는 납치 꾼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인신매매 꾼들이 중국에서 팔려간 여성들을 다시 납치해다가 내몽고 쪽에 다시 팔아먹는 그런 납치꾼들이 생겼는데 그 납치꾼에게 우리가 납치됐습니다. 화령시로 갔습니다. 그때 우리를 1만 위안에 팔려고 할 때 안가겠다고 싸움이 나서 이웃집의 신고로 공안에 붙잡혀 북송되었습니다. 북송이 됐다가 다시 탈출을 해서 나왔습니다.
제가 북송된 지 3일 만에 함경북도 무산군 노동단련 대에서 탈출했습니다. 딸을 거기다 두고서 말입니다. 왜냐면 내가 살아야만 큰딸도 찾을 수 있고 작은딸도 찾을 수 있고 평양에 두고 왔던 아들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탈출을 했는데 갈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두만강을 넘을 때 두만강에 피눈물을 뿌리며 건널 때의 심정이란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만강에 뛰어들 때는 알았는데 장마철에 물이 불어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제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두만강 영현이라는 데에 한 노인 집에 누웠더라고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으니까? 두만강에 빠졌는데 중국 쪽에서 젊은 사람이 일하다가 분명히 여자 한 분이 물에 뛰어들었는데 올라오지 않아 살피다가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그분이 건져내어 살았습니다. 중국의 두만강 쪽에는 인신매매 꾼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다시 팔려가게됐는데 도망쳤습니다. 왜 도망했느냐면 처음 있던 팔도라는 곳의 전화를 동생도 알고 있고 딸도 알고 있잖아요.
둘째딸을 노동단련 대에 두고 도망쳤지 않아요. 내가 아무리 머슴처럼 살았지만, 그곳을 가야만이 우리 둘째 딸이 단련 대에서 살아나오면 다시 엄마를 찾아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서 한 석 달을 일하는데 갖은 고생 끝에 둘째 딸이 다시 연락되고 찾아왔습니다. 딸과 함께 살다가 2000년도에 다시 인신 매매꾼에 또다시 납치되었습니다. 밤에 자다가 불의의 습격한 납치 꾼에게 납치되었습니다. 이 인신매매 꾼들은 우리를 한번 넘기고 다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공안처럼 빼앗아서 두세 번 팔려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딸과 함께 팔려 다니는 것은 짐승보다 못한 일이잖아요. 그래서 거기서 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신고가 돼서 잡혔는데 화령변방대에 두번이나 잡혔습니다. 그래서 무산군 보위부에 두 번이나 북송됐습니다. 북송됐다. 다시 탈출하게 됩니다.
청진 집결 소에서 평양으로 이송도중에 둘째 딸과 청진역에서 탈출했습니다. 다시 함경북도 무산까지 와서 다시 두만강을 넘게 됩니다. 단지 내가 돈을 벌어야만 중국의 큰딸도 찾을 수 있고 북한의 아들과 남편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탈출하게 됩니다. 그러나 또다시 납치 꾼에게 납치되었습니다.
내몽고에 있는 한족에게 팔려고 넘겼는데 기차역에서 탈출했습니다. 그 이후 살던 집으로 다시 갔습니다. 중국에서 인신 매매꾼에게 3-4번 팔리고 납치 꾼에게 납치당하면서 말 못하는 타향살이 중국에서 짐승보다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중국의 인신매매 꾼들은 북한여성들을 소나 돼지보다도 값없게 여깁니다.
참 그런 수모를 받을 때 옛날 북한에서 이런 교육을 받았습니다. 해방 전에 올바른 영도자가 없어서 북한인민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서 중국으로 만주로 갔다. 이런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솔직히 북한주민들이 영도자가 있지 않습니까?
내로라하는 김일성 수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있는데 이런 좋은 지도자를 만났다고 하지만 왜 내가 스스로 탈북을 해야 하나 옛날에는 올바른 지도자 없어서 탈북했지만, 지금은 올바른 지도자가 있다는 내로라하는 내 땅에서 왜 내가 탈북을 해야 하나! 이런 서러움으로 울고 중국에서 자식들을 찾지 못한 눈물 속에서 살다 보니까. 이렇게 안경을 끼게 됐고 머리는 탈모증이 생겨서 머리가 다 빠지게 됐어요.
질문 : 가족들을 중국에서 어떻게 만나 셨습니까?
답변 : 제가 2번이나 북송됐습니다. 북송되어 다시 넘어올 때는 연변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 생각이 들어 청도로 들어갔습니다. 둘째딸과 죽는 힘을 다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돈을 벌어야만 광고를 해서 큰딸도 찾을 수 있고 북에 두고온 남편과 아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죽도록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쪽으로는 광고를 냈습니다. 청도에서 2001년 모 잡지에 김춘애 어머니께서 큰딸을 애타게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냈습니다. 한쪽으로는 북한의 형제들에게 돈을 보내면서 아들을 찾아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몇 달 후에 연락이 왔는데 형제에게서 아들이 죽었다고 다시는 찾지 말라고 했는데, 저는 그때 그랬습니다. 죽지 않았다. 엄마와 자식 간의 모성애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형제에게 부탁을 안 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겠다고 했는데 돈을 벌어서 북한에 보낸 지 1년 만에 아들을 찾았습니다.
잡지에 광고를 냈지 않아요. 마침 우리 큰딸이 목단 강 쪽에서 일하다가 아는 사람의 집에 갔는데 잡지가 있더래요. 잡지를 보니까. 엄마가 자기를 찾는다는 광고가 나온 것을 보았답니다. 저는 광고를 내고서는 손 전화기를 항상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밤에 잘 때도 목에 걸고 자곤 했습니다. 만일 광고를 보면 언제라도 전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02년 12월 16일에 저녁 7시에 난데없는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으니까 어떤 남자분이 김춘애 씨가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맞다고 하니까. ‘잠깐만’하고 전화를 바꾸는데 큰딸이 전화를 하드라고요. 그땐 참 꿈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큰딸과 그날 통화를 하고 4일 만에 둘째딸이 친구와 함께 언니 있는 곳에 가서 큰 언니를 데려왔고 이렇게 해서 큰딸을 찾고 북한에는 계속 돈을 벌어서 보냈지 않아요. 2003년 1월에 동생이 아들을 찾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아들하고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2003년 3월 8일에 우리 아들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그래서 온 식구가 다 만났지 않아요. 만나고 보니까 아빠는 없더라고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더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도 다 찾았는데 또 내가 2번씩 북한에 잡혀가곤 하니까. 고향에 가곤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리곤 단 한 가지 내가 남한으로 가야만이 자식들을 데리고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중국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왜냐면 중국에 살려면 숨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지 않아요. 두 딸과 아들을 데리고 베트남과 캄보디아 태국을 거쳐 2006년 6월에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MC :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 다음 시간에는 탈북자 김춘애 씨와 북한으로 강제북송되는 과정에서 맞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 나눕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기였습니다.
'탈북자관련소식 > 증언-북한생활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탈북자 김춘애씨(3) (0) | 2009.09.02 |
---|---|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탈북자 김춘애씨(2) (0) | 2009.08.25 |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 김태산 전 체코 주재 북한 무역회사 사장 ③ 해외여행,북에선 ‘그림의 떡’ (0) | 2009.07.02 |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 김태산 전 체코 주재 북한 무역회사 사장 ② "자유로운 선거 문화에 놀라" (0) | 2009.07.02 |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 김태산 전 체코 주재 북한 무역회사 사장 ① “북쪽의 노예같은 삶에 환멸” (0) | 2009.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