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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관련소식/증언-북한생활1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탈북자 김춘애씨(3)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 탈북자 김춘애 씨③ "북에선 꿈도 못꿨던
내 차 몰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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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6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 진행에 이현기 입니다.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 이 시간은 탈북자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탈북자 김춘애 씨와 함께하는 세 번째 마지막 시간입니다.

RFA PHOTO/ 이현기

지난 8월 초 미국 워싱턴의 자유아시아방송 본사를 방문한 김춘애 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춘애 씨는 북한 인민군 중대장 출신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1997년 큰딸에 이어 1999년과 2000년 세 차례의 탈북과 강제 북송 중에 잃어버렸던 두 딸을 찾았고
북한의 아들도 탈북해 2003년 6월 한국에 정착해 사는 탈북인 주부로서 또 방송인으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김 씨는 평양 출신으로 평양시도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1995년 하순부터 배급이 중단되어
가정주부로서 또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살기가 어려워 탈북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 오늘은 김춘애 씨와 북한 내부의 소식으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자식과 부인을 중국에 내다 판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나눕니다.

질문: 북한에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자식과 부인도 판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답변: 저는 고향이 평양입니다. 평양에도 배급이 끊기면서 탈북자가 있는지, 월경자가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말로는 굶어 죽는 사람도 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제가 중국 변방부대에 35일간
있으면서 6번까지 강제북송되었던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한 여성은 가족이 두 딸과 남편 등
4식구인데 먹고 살기가 어려우니까 남편이 부인을 중국에 팔았습니다. 가족 생계를 위해서 말입니다.
팔아 넘기면서 제발 임신만 되지 않게 하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 부인을 팔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성이 임신이 됐습니다. 여성은 피임약을 쓰지 않으면 임신이 되잖아요.
이 여성이 임신이 돼서 북송되면서 걱정을 하는 겁니다. 우리 남편이 나를 팔면서 제발 임신만 되지
 말라고 했는데 이렇게 임신이 돼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하소연하는 여성도 봤습니다. 또 다른 경우는
어머니가 (가족이 다 굶어 죽을 수가 있으니까) 딸을 중국에 파는 겁니다. 너만이라도 굶어 죽지 말고
살라는 겁니다. 이런 비극적인 모습도 봤습니다.

질문: 중국에서 탈북자로서 어려운 생활을 할 때 남은 북한의 가족은 어떻게 됐습니까?

답변: 북한에서 우리 가정이 갑자기 파산되는 불행이 있었습니다. 큰딸이 먼저 중국에 갔고 제가
둘째 딸 데리고 큰딸을 찾으러 중국에 갔다가 나올 수가 없었잖아요. 남편은 북한에서 아들을 데리고
있을 때 제가 한달먹을 식량을 준비해두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식량이 없어지도록 제가 집에
오질 않으니까 남편은 어쨌든 아들과 생계를 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직장에 무단결근을 했다는
죄와 장마당에 나가서 술과 담배 장사를 했다는 죄 때문에 분기당 생활 총화의 비판대에 올라
출당을 맞고 평안남도 증산 군에 있는 노동교화소에 가서 1년 만인 2000년도에 굶어 죽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하루아침에 아빠도 잃고 엄마도 잃고 북한에서 꽃제비로 살았습니다.

질문: 김춘애 씨 탈북과정에서 많은 고생 끝에 중국 아시아를 거쳐 드디어 한국으로 갈 때 비행기를
탔을 텐데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던 소감을 이야기해 주세요?

답변: 저는 비행기 하면 재미있다고 할까 어처구니없다고 할까 추억이 있습니다. 제가 자녀를 데리고
중국을 떠나서 베트남, 캄보디아를 통해서 왔습니다. 캄보디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오려면
태국에 와서 갈아타야 합니다. 갈아타고 오는데 바다를 건너지 않습니까? 비행기가 오는 중에 떠는
거예요. 비행기를 처음 타니까. 무서워서 아이들보고 눈감고 자라 그랬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식하지요. 아이들도 겁이 났던 거예요. 아이들에게 그랬어요. 자다 죽으면 무서움이 덜하다더라고
했어요. 아이들을 눈감으면서 자라고 했는데 지금은 한국에 와서 일본도 다녀왔고 미국도 3번 왔습니다.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지금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내가 너무 무식했구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질문: 김춘애 씨는 북한에서 장교로 복무해 그런대로 잘 나가는 편이라 생각해 보는데요. 남한에 와서
즉 자유세계에 와서 자신이 직접 운전도 하고 계시지요. 이렇듯 북한과 남한에서의 생활을 비교해
주시지요?

답변: 한국에서의 생활을 회고해 보겠는데요. 아침에 아들이 차 운전하는 모습 또 저 자신이 차를
운전하면서 서울 시내를 다닐 때면 긍지가 높습니다. 저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지금도
북한에 있었다면 내 차를 직접 운전하면서 서울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겠나. 또 우리가 북한에 있었다면
아들이 자가용 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겠나 하는 생각해 봅니다. 저희 남편이 북한에서 운전사 기업소에
있었습니다. 남편이 그래서 항상 운전해보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소원을 못
이뤘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우리 아들이 딸들이 다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너무나 남한과 북한의 차이를 생각하게 됩니다. 북한은 생지옥이고 남한은 천국이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항상 저는 서울에 와서 행복한 생활을 만끽할 때마다 지난날 북한에서의 어려웠던 일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항상 자녀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질문: 김춘애 씨 자유세계를 살아본 경험으로 북한에 바라는 이야기가 있으면 해 주시지요?

답변: 전직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가서 미국 여기자 2명을 데리고 왔지 않습니까? 이것을 보면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한 국민을 위해서 북한을 가서 2명을 데리고 온 것을 생각하며
북한의 김정일도 북한 인민을 위해서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온 힘을 기울였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우리는 항상 그랬어요. 북한은 전쟁준비만 하는데 그 비용 중 50%만 떼서
인민생활에 써도 우리 인민들이 굶어 죽지 않을 수 있겠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저는 한국에 온 뒤 일본
미국 등 자유세계를 다녔지만, 전쟁이란 것을 생각하지 않는 데 비해 북한은 전쟁밖에 모르지 않아요.
제 생각에는 북한 혼자서 전쟁을 하겠다고 날뛰고 있는데 이제라도 북한 권력자들이 마음을 돌려서
전쟁준비를 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 인민의 생존을 위해 온 힘을 쏟기를 바랍니다.

질문: 한국에서 명절이 되면 고향 생각나시지요?

답변: 지금 고향에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80세가 넘은 어머니가 재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명절에 비나 눈이 올 때면 마음이 착잡할 때가 잦습니다. 이렇게 쓸쓸할 때는 친구들과 소주를
마십니다. 명절 때면 고향에 있는 부모 형제들이 그립습니다. 한국에는 명절이나 평일 때도 비슷합니다.
시장에 가도 어느 때나 먹고 싶은 것 살 수가 있습니다. 저는 시장에 가서 과일과 먹는 음식을 볼 때마다
고향 생각을 많이 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북한에서 볼 수 없었던 이런 음식을 대접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명절 때 많은 음식을 놓고는 고향에 있는 우리 형제도 모여서 남방
과일과 맛있는 음식 등 내가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질문: 김춘애 씨는 한국에 와서도 열심히 사는 분 중의 한 사람으로 북한사람들이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국생활을 소개해 주세요?

답변: 북한에서는 남한사회에 대한 좋지 않은 세뇌 교육을 받았습니다. 자본주의 남한사회는 썩고 병든
사회라고 배웠지요. 한참 학교 갈 나이에 책가방 대신 깡통을 둘러매고 거리에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책가방 대신 구두닦이 통을 둘러매고 길거리에서 구두닦이를 한다. 판잣집에나 남의 처마밑에서 산다고
배웠습니다. 남한에 와서 그런 것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남한은 북한에 비하면 180도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고 남한은 천국 같은 세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북한 주민도
남한사람들처럼 행복하게 살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북한주민들도 앞으로 꼭
남한주민들처럼 인권이 있고 자유가 있는 그런 날이 머지않았는데 북한주민들도 그날까지 함께
손을 잡고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질문: 김춘애 씨는 남북한을 잘 아는 통일의 역군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답변: 저는 북한이 통일되거나 개방이 되면 누구보다 먼저 북한에 들어가서 복지관을 설립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들이 부모 없이 꽃제비 생활을 해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복지관을
설립해서 노인들과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고 싶습니다.

‘북한에 살다 남한에 와보니’ 마지막 시간으로 탈북자 김춘애 씨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자식과
부인을 중국에 내다 판다는 비극적인 이야기 나눴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