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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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북한에서 체제 선전 작가로 활동하던 송벽 씨가 북한을 탈출한 지 10년 만에 미국 워싱턴 시내 14가 선상의 전시공간 듄즈(The Dunes)에서 4월 9일부터 4월 30일까지 개인 전시회를 열고 있다.
송벽 씨의 워싱턴 DC 전시에는 18점의 북한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듄즈’ 전시장에 들어서면 북한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의 참담함이 그림에 비춰온다. 송씨의 그림에는 북한의 피폐한 현실에 유머와 해학의 옷을 입힌 것으로 유명하다. 배우 메릴린 먼로가 바람에 날리는 스커트를 붙잡는 유명한 그림, 하지만 몸 위에 붙어 있는 얼굴은 먼로가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북한 사회를 감추려 하는 모습을 먼로의 치마로 형상화한 것이다.
전시장을 찾은 한 여성 미국인은 미소 없는 아이들의 모습과 비정상적인 체격에 마음 아프다고 했으며, 한 미국 남성은 송벽 작가를 칭찬한다.
송씨가 미국 전시를 결심한 것은 북한주민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길을 찾기 위해서란다. 그는 ‘혼자서 자유를 만끽하는 게 늘 미안했다.’라고 말하고 ‘국제사회가 북한 주민의 절박한 상황을 이해하고 도와달라’고 호소하기 위해서 미국을 찾았다고 말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탈북 화가 송벽 씨가 한국에서 자유를 찾은 이야기로 함께한다.
황해도가 고향인 송벽 씨는 북한에서 7년간 선전 포스터를 그리다 탈북했다. 처음엔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려고 했다. 하지만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아버지를 잃고 자신도 수용소에 감금됐다가 북한 사회에 환멸을 느껴 북한을 탈출한다.
송벽: 저는 북한에서 김정일을 찬양하는 선전 포스터 그림을 그리다가 탈북해 한국으로 왔거든요. 북한에서 주로 포스터를 그려 거리에 설치해 국민한테 김정일과 당을 위해서 충성하도록 하던 그런 선전 일꾼으로 생활하던 송벽 입니다.
송벽 씨는 북한을 탈출해 2002년에 남한에 정착한 후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북한 사회에 잘못된 점을 알게 됐으며 이 지구 상에 북한과 같은 나라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송벽: 제가 한국에 와서 공부하면서 북한사회의 모순점과 예술의 자유에 대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고 과연 자유라는 게 무엇인가! 에 대해서도 직접 느끼게도 되었고, 체험하게 됐고, 그래서 북한 국민은 왜 자유를 모르고 살까? 가장 기초적인 자유가 무언 지 조차도 모르고 사는 북한국민이 한없이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70억이 사는 지구상에서의 북한과 같은 나라 과연 존재할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송벽 씨는 어떤 동기로 선전 작가가 됐을까? 궁금하다. 혹 당의 든든한 빽이 있었을까?
송벽: 아니에요.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서 선전 일꾼으로 발탁되는 것은 아니고요. 자기가 능력이 되고 그림 실력이 당 간부들 속에 인정을 받을 때만이 발탁되거든요. 특히 따로 배우고 특별한 사람이 선전 일꾼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선전작가로 활동하면 북한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아닌가 물어봤다.
송벽: 아니에요. 잘살지도 못했고요. 똑같아요. 선전작가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를 해주지 않아요. 일반 국민하고 같이 배급받곤 하는데 단지 다르다면 남들이 일할 때 저는 좋아하는 포스터 그림을 그린다. 그것 하나만 다를 뿐이고.
송벽 씨는 아버지와 식량 구하러 중국을 건너려다 붙잡혀 감옥살이하고 탈북하게 된 동기가 됐단다.
송벽: 90년대 북한 식량사정이 엄청 곤란했거든요. 평양에서도 그 당시 힘들게 살았거든요. 그때 당시는 중앙당 간부나 조금 나았을까? 거의 가 다 먹지 못해서 힘들었거든요. 그때 저희 집도 어쩔 수가 없고 주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죽어나가는 사람, 길에 버려진 사람이 있을 때 저희 집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며칠을 굶다가 아버지와 같이 중국에 가서 식량을 구해오자! 이렇게 해서 중국으로 식량 구하러 가던 중에 저의 아버지는 실족해 두만강에서 시신도 못 건졌고, 저는 거기서 아버지 시신을 건지려고 하다 북한 경비대에 도움을 청하러 간 것이 죄가 되어 감옥살이했거든요. 감옥생활을 하면서 느낀 게 단지 배가 고파서 중국으로 식량 구하러 가겠다는 그런 욕심 하나, 그 하나 때문에 내가 과연 이렇게 고통을 받고 나라를 배반한 역적 죄인으로 살아야 하나! 이것이 저에게는 모순점으로 닦아오더라고요.
송벽 씨는 북한에서 감옥살이하면서 자신의 삶을 내놓고 의탁해야 할 나라가 북한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단다.
송벽: 북한사회가 이랬나! 내가 이 사회를 위해 충성했나! 삼시 세끼 굶으면 임금도 도적질한다는데 우리는 삼일이 아니라 더한 고통을 받다가 중국으로 쌀을 구하러 가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중국으로 넘으려던 것이 그렇게 잘못인가! 라고 생각되어서 이 나라에 내가 내 삶을 내놓고 의탁하고 살아야 할 나라가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감옥에서 했거든요. 그래서 수용소 생활을 겪으면서 내가 살아서 나가면 북한사회에서는 내가 인생을 맡기지 말라야겠다는 생각에 병보석으로 나와서 다시 제 차 북한을 탈출하게 된 거지요.
송벽 씨는 한국에서 미술을 전문으로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진정한 예술의 자유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송벽: 한국에 2002년에 와서 과연 내가 무얼 할 것인가! 생각을 많이 했어요. 북한에서 선전화를 그렸었고 한국에서 다시 한 번 제2의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나! 그러기 위해서는 미술공부를 새롭게 시작해 볼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2003년도부터 공주 사범대 미술교육학과를 지원해서 1학년부터 체계적으로 밟아 오면서 예술의 자유가 무언지! 그 뜻은 잘 몰랐어요. 미술에도 자유가 있나! 북한에서는 자유라는 걸 모르고 자라 왔기 때문에 미술에서도 자유가 있는가에 대해서 반문하게 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에 들어와 다시 공부 시작하면서 미술가는 자기만의 독특한 메시지와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야겠구나! 그런 것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송벽 씨가 한국에서 자유를 찾은 이야기 계속된다.
송벽: 아 자유라는 것, 내가 그리고 싶고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그려 나갈 때 미술가, 화가들의 자부심이라고 할까? 자기만의 메시지를 대중 앞에 내 논다. 보여준다. 이것이 진정한 예술가가 아닌가! 이것을 느끼면서 북한에서 생활과 한국에서 생활에 대해서 많이 하게 되고 이것이 진정한 예술의 자유로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송벽 씨는 북한에는 예술의 자유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오직 충성만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송벽: 북한은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현 정권하에서는 예술의 자유가 있을 수가 없어요. 항상 포스터 그리는 것도 찬양, 뭐 북한 국민이 굶어 죽는 것 포스터로 그린 것 나온 것 봤습니까? 그런 것 없거든요. 예술에는 노래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미술도 다 오직 충성하는 것 하나! 그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술에 자유가 없다는 거지요.
송씨의 그림엔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이한 점은 모두가 눈을 감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번에 첫선을 보이는 작품들에선 몰래 실눈을 뜬 병사들이 나온다. 송씨는 북한 주민에게 이제 눈을 뜨라고 외치고 싶어 그림에 담았다고 설명한다.
송벽: 내가 북한에서 살아왔고 내가 북한에서 30년 동안 생활했기 때문에 북한 사람 삶의 소재를 가지고 작품을 해 나가거든요. 이분들의 현재의 삶과 그 폐쇄적이고 고립된 나라, 그 안에서만 그 안이 자기의 세계 인 양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과 생활화 하고 있는 것을 작품화해서 한국(국내)에 해외에 선보이거든요. 그것을 통해서 북한사회의 단편적인 모습을 자꾸 세계에 알리는 거예요. 과연 이것이 인간사회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우리가 세계와 더불어 살아가고 세계가 서로 공유하면서 세계 발전사를 위해서 나아가고 있는 시대에 북한만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세계인들에게 알려주는 거지요.
송벽 씨의 다음 목표는 미국에 이어 유럽 등 전 세계를 돌며 그림을 통해 북한 인권문제를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탈북 화가 송벽 씨가 한국에서 자유를 찾은 이야기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송벽 씨의 워싱턴 DC 전시에는 18점의 북한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듄즈’ 전시장에 들어서면 북한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의 참담함이 그림에 비춰온다. 송씨의 그림에는 북한의 피폐한 현실에 유머와 해학의 옷을 입힌 것으로 유명하다. 배우 메릴린 먼로가 바람에 날리는 스커트를 붙잡는 유명한 그림, 하지만 몸 위에 붙어 있는 얼굴은 먼로가 아니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북한 사회를 감추려 하는 모습을 먼로의 치마로 형상화한 것이다.
전시장을 찾은 한 여성 미국인은 미소 없는 아이들의 모습과 비정상적인 체격에 마음 아프다고 했으며, 한 미국 남성은 송벽 작가를 칭찬한다.
송씨가 미국 전시를 결심한 것은 북한주민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길을 찾기 위해서란다. 그는 ‘혼자서 자유를 만끽하는 게 늘 미안했다.’라고 말하고 ‘국제사회가 북한 주민의 절박한 상황을 이해하고 도와달라’고 호소하기 위해서 미국을 찾았다고 말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탈북 화가 송벽 씨가 한국에서 자유를 찾은 이야기로 함께한다.
황해도가 고향인 송벽 씨는 북한에서 7년간 선전 포스터를 그리다 탈북했다. 처음엔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려고 했다. 하지만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아버지를 잃고 자신도 수용소에 감금됐다가 북한 사회에 환멸을 느껴 북한을 탈출한다.
송벽: 저는 북한에서 김정일을 찬양하는 선전 포스터 그림을 그리다가 탈북해 한국으로 왔거든요. 북한에서 주로 포스터를 그려 거리에 설치해 국민한테 김정일과 당을 위해서 충성하도록 하던 그런 선전 일꾼으로 생활하던 송벽 입니다.
송벽 씨는 북한을 탈출해 2002년에 남한에 정착한 후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북한 사회에 잘못된 점을 알게 됐으며 이 지구 상에 북한과 같은 나라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송벽: 제가 한국에 와서 공부하면서 북한사회의 모순점과 예술의 자유에 대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고 과연 자유라는 게 무엇인가! 에 대해서도 직접 느끼게도 되었고, 체험하게 됐고, 그래서 북한 국민은 왜 자유를 모르고 살까? 가장 기초적인 자유가 무언 지 조차도 모르고 사는 북한국민이 한없이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70억이 사는 지구상에서의 북한과 같은 나라 과연 존재할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송벽 씨는 어떤 동기로 선전 작가가 됐을까? 궁금하다. 혹 당의 든든한 빽이 있었을까?
송벽: 아니에요.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서 선전 일꾼으로 발탁되는 것은 아니고요. 자기가 능력이 되고 그림 실력이 당 간부들 속에 인정을 받을 때만이 발탁되거든요. 특히 따로 배우고 특별한 사람이 선전 일꾼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선전작가로 활동하면 북한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아닌가 물어봤다.
송벽: 아니에요. 잘살지도 못했고요. 똑같아요. 선전작가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를 해주지 않아요. 일반 국민하고 같이 배급받곤 하는데 단지 다르다면 남들이 일할 때 저는 좋아하는 포스터 그림을 그린다. 그것 하나만 다를 뿐이고.
송벽 씨는 아버지와 식량 구하러 중국을 건너려다 붙잡혀 감옥살이하고 탈북하게 된 동기가 됐단다.
송벽: 90년대 북한 식량사정이 엄청 곤란했거든요. 평양에서도 그 당시 힘들게 살았거든요. 그때 당시는 중앙당 간부나 조금 나았을까? 거의 가 다 먹지 못해서 힘들었거든요. 그때 저희 집도 어쩔 수가 없고 주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죽어나가는 사람, 길에 버려진 사람이 있을 때 저희 집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며칠을 굶다가 아버지와 같이 중국에 가서 식량을 구해오자! 이렇게 해서 중국으로 식량 구하러 가던 중에 저의 아버지는 실족해 두만강에서 시신도 못 건졌고, 저는 거기서 아버지 시신을 건지려고 하다 북한 경비대에 도움을 청하러 간 것이 죄가 되어 감옥살이했거든요. 감옥생활을 하면서 느낀 게 단지 배가 고파서 중국으로 식량 구하러 가겠다는 그런 욕심 하나, 그 하나 때문에 내가 과연 이렇게 고통을 받고 나라를 배반한 역적 죄인으로 살아야 하나! 이것이 저에게는 모순점으로 닦아오더라고요.
송벽 씨는 북한에서 감옥살이하면서 자신의 삶을 내놓고 의탁해야 할 나라가 북한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단다.
송벽: 북한사회가 이랬나! 내가 이 사회를 위해 충성했나! 삼시 세끼 굶으면 임금도 도적질한다는데 우리는 삼일이 아니라 더한 고통을 받다가 중국으로 쌀을 구하러 가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중국으로 넘으려던 것이 그렇게 잘못인가! 라고 생각되어서 이 나라에 내가 내 삶을 내놓고 의탁하고 살아야 할 나라가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감옥에서 했거든요. 그래서 수용소 생활을 겪으면서 내가 살아서 나가면 북한사회에서는 내가 인생을 맡기지 말라야겠다는 생각에 병보석으로 나와서 다시 제 차 북한을 탈출하게 된 거지요.
송벽 씨는 한국에서 미술을 전문으로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진정한 예술의 자유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송벽: 한국에 2002년에 와서 과연 내가 무얼 할 것인가! 생각을 많이 했어요. 북한에서 선전화를 그렸었고 한국에서 다시 한 번 제2의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나! 그러기 위해서는 미술공부를 새롭게 시작해 볼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2003년도부터 공주 사범대 미술교육학과를 지원해서 1학년부터 체계적으로 밟아 오면서 예술의 자유가 무언지! 그 뜻은 잘 몰랐어요. 미술에도 자유가 있나! 북한에서는 자유라는 걸 모르고 자라 왔기 때문에 미술에서도 자유가 있는가에 대해서 반문하게 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에 들어와 다시 공부 시작하면서 미술가는 자기만의 독특한 메시지와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야겠구나! 그런 것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송벽 씨가 한국에서 자유를 찾은 이야기 계속된다.
송벽: 아 자유라는 것, 내가 그리고 싶고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그려 나갈 때 미술가, 화가들의 자부심이라고 할까? 자기만의 메시지를 대중 앞에 내 논다. 보여준다. 이것이 진정한 예술가가 아닌가! 이것을 느끼면서 북한에서 생활과 한국에서 생활에 대해서 많이 하게 되고 이것이 진정한 예술의 자유로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송벽 씨는 북한에는 예술의 자유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오직 충성만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송벽: 북한은 과거에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현 정권하에서는 예술의 자유가 있을 수가 없어요. 항상 포스터 그리는 것도 찬양, 뭐 북한 국민이 굶어 죽는 것 포스터로 그린 것 나온 것 봤습니까? 그런 것 없거든요. 예술에는 노래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미술도 다 오직 충성하는 것 하나! 그것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술에 자유가 없다는 거지요.
송씨의 그림엔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많이 등장한다. 특이한 점은 모두가 눈을 감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번에 첫선을 보이는 작품들에선 몰래 실눈을 뜬 병사들이 나온다. 송씨는 북한 주민에게 이제 눈을 뜨라고 외치고 싶어 그림에 담았다고 설명한다.
송벽: 내가 북한에서 살아왔고 내가 북한에서 30년 동안 생활했기 때문에 북한 사람 삶의 소재를 가지고 작품을 해 나가거든요. 이분들의 현재의 삶과 그 폐쇄적이고 고립된 나라, 그 안에서만 그 안이 자기의 세계 인 양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과 생활화 하고 있는 것을 작품화해서 한국(국내)에 해외에 선보이거든요. 그것을 통해서 북한사회의 단편적인 모습을 자꾸 세계에 알리는 거예요. 과연 이것이 인간사회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우리가 세계와 더불어 살아가고 세계가 서로 공유하면서 세계 발전사를 위해서 나아가고 있는 시대에 북한만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세계인들에게 알려주는 거지요.
송벽 씨의 다음 목표는 미국에 이어 유럽 등 전 세계를 돌며 그림을 통해 북한 인권문제를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탈북 화가 송벽 씨가 한국에서 자유를 찾은 이야기로 함께했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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