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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1)-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1)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중국의 역사.문화가 우리 신시 및 단군조선의 굴레에서 맴돌던 화하, 화산족(華夏,華山族:나라 를 열었던 지명에서 나온 이름일 뿐 혈통적 종족 이름은 아님))의 무리였고 그나마 한(漢:西漢:B.C 206~A.D. 9 / 東漢:A.D. 9~24)나라 이후의 한족(漢族)이나, 중화민국 (中國:A.D. 1911~1949 ) 이나 중화인민공화국(중국:A.D. 1949~현재)은 수십의 종족이 섞여 이루어진 민족일 뿐이다. 그런 그들이 역사조작에 그들의 사서를 모두 태우고 다시 쓰는 분서갱유와 춘추필법의 사필원칙 이 우리와 무슨 연관이 있겠느냐고 반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딱딱하고, 어렵기만한 기록형 역사기술에서 탈피하여 근거 불확실하면..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0)-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0)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지난 칼럼에 이어 몇 가지 더 살펴보자. ** 단군조선 제12세 아한(阿한)왕검 38년(기원앞 1797)에 하(夏)나라의 걸왕이 포악하고 무도 하여 멸망에 이르는 것을 보면서 아한 왕검께서는 국정을 더욱 바로 살피니 하(夏)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상(商)나라의 신하나 백성되기를 마다하고 조선으로 들어와 살았다. *이윤(伊尹)은 일찍이 유위자(有爲者:11세 단군 도해왕검의 태자인 아한의 태부로 삼았으며 아한 왕검은 스승인 그를 國太師로 삼았다.)에게 배워 재주와 덕을 함께 갖춘사람으로 상나라 탕왕의 재상이 되어 탕왕을 도와 하나라 걸왕을 쳤다. **무인년(기원앞 1783)에 상나라 사절이 처음으로 입조하였다. 이후의 기록을 다 옮겨올 수 없어 ..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9)-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9)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중국의 하.상.주 또는 하.은.주 시대로부터 현 중화인민공화국까지의 역사를 역대순으로 살펴 보았는데, 사실 하.상.주 이전의 요임금과 순임금은 물론 그들의 최초의 황제라는 헌원의 대를 통틀어 우리 민족 조상의 신시, 단군조선과 연계 또는 관련되지 않은 중국의 고대사는 없다. 앞서 설명한 바 있는 기원앞 2700년대의 한족의 시조라는 황제 헌원과 단군조선 앞 신시 14 대 한웅 자오지 천왕과의 관련기록을 보자 (우리의 한단고기, 규원사화 및 중국 최초의 정사라 는 사기 권1, 이외 수십여종의 사서) 신시(또는 九黎구리)자오지 환웅은 13대 환웅 사와라(斯瓦羅)가 세상을 뜨시고 보위에 올랐는 데 기원앞 2706~2598년까지 109년 동안 제위..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8)-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8)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기원앞 1046년에 일어난 주(東周, 西周)나라가 275년 만인 기원앞 771년에 패망하면서 지나(중국)는 춘추시대에 접어든다. 소위 하,상,주 또는 하, 은, 주 시대가 끝나고 춘추열국시대에 접어드는 이 시대까지도 중국 이 그토록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앞세워 자랑하는 한족(漢族)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기 22세기 (서기 3세기)에 와서 한나라가 생기고 나서야 한(漢), 한인(漢人)이라는 말이 등 장하지만 종족을 의미하는 한족(漢族)이라는 명칭은 등장하지 않고 단기 29세기(서기 5세기) 송나라 범엽의 후한서에도 동이족의 분류는 상세히 기록하면서도 정작 한족이라는 명칭은 등 장하지 않는다고 안호상의 에 기술하고 있다. 이어서 한나..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7)-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7)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여기 즉 이 삼황의 시대는 중국의 실역사에 해당하지 않고 신화의 시대로 분류되는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대목은 이미 앞서 소개했 듯 염제신농(炎帝神農), 태호복희(太호伏羲), 여와 등 중국의 3조상은 우리의 단군조선 앞 신시의 실존 인물들이다. 즉 태호 복희씨는 신시(한배달) 제5세 환웅 태우의(太虞義) 의 아들 열둘 중 막내아들이며, 제6 세 환웅 다의발(多義發)의 아우이다. 그는 삼신산에 가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천하(天河)에서 괘도(卦圖)를 얻었으며 팔괘(八卦)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으며, 여와는 환웅 다의발의 여동생이니 복희씨와도 남매지간이다. 신농씨는 신시 제 8세 환웅 안부련 제위시 강수(姜水)의 군사감독관 소전(小典)의 아들이다..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6)-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6)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바로 세우자는 기치를 내걸고 워싱턴 중앙일보사의 관심과 적극적적인 지원 아래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을 연재해온 지도 36주에 이르렀다. 일본이 우리 고조선과 백제, 가야, 고구려, 신라의 역사문화를 떠나서 그들은 그들만의 독창적인 역사는 물론 신화 마저도 내세울 수가 없었기에 우리의 역사 및 자신들의 사기와 일본서기까지도 변조 하였다는 것을 일일 이 증거를 제시하며 알린 바도 있다. 이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나서는 대 장정은 신시 17대 1565년을 거쳐 단군조선 12대 아한 왕검까지 이르렀는데, 이쯤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발원하여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오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남겼던 대륙(중원), 소위 중국땅 ..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5)-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5)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제 12세 단군 아한(阿漢)께서는 원년 정해년(기원앞 1834)에 맏아들 흘달(屹達)을 태자로 세우고 둘째 아들을 안평왕(安平王)으로 삼았다. 이듬해 무자년 여름에 발 하나 달린 짐승이 송화강 북쪽 변방에 나타나 슬피울었다. 임금께서 유위자(有爲子)에게 물으니 유의자가 답하기를 “천지조화의 징조로서 이 짐승은 하(夏)나라 남쪽의 신명(神明)한 양수(陽獸)인데, 하나라가 앞으로 어려울 것을 미리 알고, 그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슬피울고 있는 것입니다” 무자 2년 즉 기원앞 1833년 가을에 단군 아한왕검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시하였는데 요하 (遼河)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巡狩管境)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과 호를 새겨 이를 전하..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4)-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4)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나라를 위하는 길에 사기(士氣)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사학(史學)을 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 이 없으니 그 까닭은 사학이 밝지 아니하면 사기를 펼 수 없고, 사기를 펼 수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정사(政事)와 법령(法令)이 갈라진다….. 나라는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며 사람은 정사와 더불어 갖춰지고 드러나는 것이니… 바른 길도 사람다운 생각도 다 없어지고, 나라꼴도 나라 정신도 다 사라져버린 후에 나라를 위한다는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만 안전하다고 하겠는가…..(中略) 신시(神市)에 하늘을 여니 이로부터 나라의 계통이 이어지게 되었고, 나라의 계통이 이어짐에 나라가 바로 서게 되었으며, 백성도 다스리는 계통이 있음으로써 모여들게..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3)-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3)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제10세 단군 노을 왕검 때의 병오년(기원앞 1946)에 육지에서 연꽃이 피더니 지지를 않았고, 장백산의 누워있던 돌이 저절로 일섰으며 천하(天河)에서 신기한 거북이가 등에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그 그림은 윷판과 같았다고 하였는데 오늘은 그 윷판에 관한 기록, 즉 ‘윷놀이에는 한민족 신선철학의 정수와 환단(桓檀:한단) 시대의 통치조직이 담겨 있다’고 하는 그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윷놀이에는 동양철학의 핵심인 오행(五行)의 방위관념(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중앙해 태)과 성수(聖獸)신앙, 칠성(七星)신앙, 삼신(三神)신앙이 들어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들 태극기에 그려진 팔괘(八卦), 오행상수철학, 신선사상, 유교사상..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2)-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2)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제9세 단군 아술(阿述)왕검 제 8세 단군 우서한(于西翰)왕검께서 보위에 오른지 단 8년만인 을묘년(기원앞 1986)에 세상을 뜨시고 태자 아술이 보위에 오르니 곧 제9세 단군 아술(阿述)왕검이다. 역시 원년인 병진년(기원앞 1985)에 맏아들 노을(魯乙)을 태자로 세웠다. 이 해 봄에 두 해가 함께 뜨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늘어섰는데 마치 울타리같았다. 임금이 어질고 덕이 있어서 법을 어기는 자마저도 “땅이 오물로 더러워질 수도 있으나 결국 비나 이슬로 씻겨내려가는 법”이라며 용서하니 그 덕에 감화되어 법을 어긴자들을 포함, 백 성들이 크게 감화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사년(1984)에는 청해(靑海)의 우착(于捉:단기고사에는 于促.. 더보기